1. 물결 위의 천국, 레나페족의 '마나하탄'시대
2. 항해시대의 확장과 북미대륙 속의 '마나하탄' 시대
3. 영국령 뉴욕속의 '맨해튼' 시대
4. 미국의 초대 수도와 상업 수도의 '맨해튼' 시대
맨해튼 격자 계획(Commissioners' Plan of 1811)은 금융수도 맨해튼의 시작입니다. 맨해튼은 레나페족의 '마나하탄' 시대부터 항해 시대의 확장, 영국령 뉴욕, 그리고 미국의 초대 수도를 거치며 오랜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1800년 6만여 명에서 1810년 10만여 명으로 10년간 인구가 60% 증가했습니다. 이는 미국 전역 인구 증가율 35%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였습니다.
당시의 문제는 뉴욕 인구가 서울의 7분의 1(대모산을 제외한 강남구와 송파구 합계 면적과 유사)에 불과한 맨해튼에 집중되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로어 맨해튼(잠실역 인근 아파트 단지)에 밀집되었다는 점입니다. 자연 발생적 촌락에서 무계획적으로 성장한 이 지역은 교통 혼잡과 도시 관리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뉴욕격자계획을 맨해튼의 인구유입을 예측하고 장기로드맵을 구상하였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격자 계획 시행중인 1825년 허드슨강과 오대호를 연결하는 이리운하 건설로 맨해튼이 더욱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인구가 폭증한 결과를 두고 보면, 계획을 수립할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외부 요인을 수용할 수 있는 계획 자체의 유연성과 확장성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감탄스럽습니다.
뉴욕주의 그리드 계획(Commissioners' Plan of 1811)을 주도한 위원(거버너 모리스 (Gouverneur Morris), 존 러더퍼드 (John Rutherfurd),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변호사, 시미언 드 위트 (Simeon De Witt), 뉴욕주 측량국장)은 3인이었습니다.
필자는 이 계획의 영웅, 거버너 모리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리스는 뉴욕주 입법부로부터 도시 계획의 방향을 결정하고 공식화할 권한을 부여받은 위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직선적이고 실용적인 격자형 시스템을 채택하도록 승인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그리드 계획에 첨부된 보고서는 도시 개발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격자 계획의 근본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뉴욕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모리스는 미합중국 헌법의 최종 문구를 작성하고 서문을 쓴 인물로, 이미 미국 역사에서 거대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전과 정책적 기반 위에서, 이들은 1807년 뉴욕주 의회의 위임을 받아 맨해튼의 14번가부터 155번가까지의 토지에 직사각형 모양의 격자형 도로와 구획을 정하는 계획을 수립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뉴욕시 맨해튼의 상징적인 도시 구조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계획의 기초측량을 3년간 수행하고, 계획을 집행한 또 다른 영웅인 측량 책임자(Chief Surveyor) 존 랜들 주니어(John Randel Jr.)가 있습니다. 랜들은 그리드 계획을 현실의 맨해튼 지형 위에 정확하게 옮겨 놓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섬 전체를 면밀하게 측량하고, 1,600개에 가까운 측량 표지석(mile markers)을 설치하여 그리드의 각 교차점을 표시했습니다.
당시 토지 소유자들의 격렬한 반대와 소송, 심지어 물리적인 방해 속에서도 7-8년간 끈기 있게 작업을 완수했습니다. 그의 세밀하고 혁신적인 측량 기술 및 토목공사 덕분에 1811년의 계획은 단순한 구상이 아닌, 향후 수십 년간 뉴욕시 개발을 이끌어갈 정확한 마스터 플랜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리스는 그리드 계획의 개념적, 정책적 아버지로서 도시의 미래를 규정하는 비전을 제시한 위인이라면, 랜들은 그 비전을 현실로 구현하고 실현 가능하게 만든 기술적 영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뉴욕주의회는 로어 맨해튼 인구 분산과 지속적인 인구 유입에 대비한 정책을 연구했고, 그 결과물이 1811년 커미셔너스 플랜(Commissioners' Plan of 1811), 즉 맨해튼 격자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둔 실용주의적 도시 설계 원칙으로, 맨해튼을 근대적인 '글로벌 금융 및 상업 수도'로 도약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807년 위원회의 임명으로 랜들 주니어가 1808년부터 측량 작업을 시작했으며, 이 계획은 1811년에 공식 채택(승인)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기존의 로어 맨해튼(휴스턴 스트리트 이남 구시가지)을 제외한 14번가 북쪽 지역부터 155번가까지의 개발을 위한 청사진이었습니다. 핵심은 직선적이고 규격화된 격자형 도로 시스템의 도입이었습니다.
도로 배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12개의 애비뉴(Avenues)와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약 155개의 스트리트(Streets)를 직각으로 배치하는 단순 획일적인 격자망을 특징으로 했습니다. 도로 폭은 애비뉴는 100피트 폭을, 스트리트는 평균 60피트 폭을 갖습니다. 각 애비뉴 사이에는 600피트 내지 920피트의 블록 간격을, 각 스트리트 사이에는 평균 200피트의 블록 간격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애비뉴와 스트리트, 즉 도로에 포함되지 않는 약 2,000개의 균일한 직사각형 블록이 만들어졌습니다.
뉴욕 정부의 격자 계획 실행은 인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격자 계획의 청사진은 1811년에 발표되었지만, 실제로 땅을 깎고(절토), 메우고(성토) 도로를 개통하는 물리적 작업은 19세기 중반을 넘어 후반까지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맨해튼 섬의 울퉁불퉁한 원래 지형(언덕, 습지, 암반)을 무시하고 직선을 강제했기 때문에, 지형을 극복하기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하수도, 가스 등 도시 인프라(Utility)의 배치와 유지보수가 단순화되어 건설 효율성이 증대되는 부수적인 이득을 얻었습니다.
격자망은 기존의 사유지와 공동체의 경계를 무시하고 직선으로 관통했기 때문에, 토지 소유자들의 격렬한 반발과 소송을 유발했습니다. 위원회는 토지 수용 권한(Eminent Domain)에 기반하여 공익과 경제적 발전을 명분으로 계획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지주들에게 애비뉴와 스트리트에 포함되는 토지에 대해서는 공채 발행으로 정당한 보상을 하였습니다. 동시에, 이 행정적 강제는 블록의 지주들에게 개발이익환수제와 유사한 특수 부과금(Assessment)을 적용하여 보상비를 세금처럼 부과함으로써, 주정부가 큰 비용을 들이지 않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모든 블록을 균일한 규격으로 획일화하여 토지 가치 평가를 객관화하고 토지를 표준화된 금융 상품처럼 취급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건축 허가 시 평탄화 작업을 전제함으로써 맨해튼의 지형은 사실상 평면 지형으로 변화했습니다.
격자 계획은 뉴욕을 효율성이 지배하는 상업 공간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경제적 파급 효과를 낳았습니다. 토지가 거래 가능한 상품처럼 표준화되고 거래의 투명성과 신속성이 높아지자, 외부 투기 자본이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이는 뉴욕이 금융 중심지로 성장하는 초기 자본 축적을 도왔습니다. 표준화된 부지 위에 건물 설계와 시공이 간편해져 건설 비용이 절감되었습니다. 획일적인 블록 구조는 이후 강철 골조 기술 및 엘리베이터와 결합하여, 초고층 빌딩이 쉽게 들어설 수 있는 물리적·경제적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격자 계획은 토지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직 경쟁을 촉발하며 뉴욕을 '수직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번호로 지정된 도로 체계는 길 찾기를 단순화하여 물류 운송과 상업적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습니다. 이는 상업 중심지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섬 북부로 체계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오늘날 맨해튼은 모든 교차로가 직각으로 만나는 격자망의 특성상 심각한 교통 체증(Traffic Congestion)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진정한 선견지명은 그 효율성에 있습니다.
격자 계획이 없었다면, 맨해튼은 로어 맨해튼처럼 좁고 불규칙하며 구불구불한 도로망이 섬 전체로 무질서하게 확장되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 교통 체증은 현재의 '신호등으로 인한 규칙적인 지연' 수준을 넘어 '물류 마비와 길 찾기의 구조적 혼란' 수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격자망은 단순한 길 찾기 시스템을 제공하여 물류의 직선성과 예측 가능성을 보장함으로써, 뉴욕이 최대 인구와 상업 활동을 수용할 수 있는 최대 효율의 시스템을 수립한 것입니다. 격자망이 획일적이고 단조로워 도시 내 방향 감각 상실과 미학적 단조로움이라는 비판을 받자, 뉴욕은 격자 계획의 경제적 논리를 넘어 질적 성장을 추구했습니다.
1850~1860년대에 걸쳐 센트럴 파크가 건설되었습니다. 센트럴 파크 조성은 격자 계획의 미학적 단조로움에 대한 반성뿐 아니라, 폭증하는 도시 인구를 위한 공공 보건 및 휴식 공간 확보라는 사회적, 보건적 필요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 이는 상업적 효율성에 집중했던 격자 계획의 유일한 결정적 예외입니다. 인구 밀집 해소, 도시 환경 질 향상 및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도시의 인간적인 요소를 보완했습니다. 1883년 브루클린 교 개통으로 맨해튼의 물리적 확장이 가능해졌으며, 1898년에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등 5개 자치구가 대뉴욕시(Greater New York City)로 통합되면서 행정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맨해튼은 그랜드 캐니언이 수평적 깊이를 보여주듯이, 강철과 유리로 빚어낸 수직적 깊이(마천루)로 압도적인 시각적 장엄함을 제공하는 인공 협곡입니다. 이 도시를 걸작으로 만드는 핵심은 바로 격자 계획의 표준화된 질서입니다. 이는 도시가 무작위적인 자연 발생적 성장이 아닌, 인간의 실용주의적 의도에 의해 설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1811년 격자 계획은 토지를 표준화된 자산으로 보고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하는 자본주의적 도시계획의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그 성공은 대규모 토목 공사와 강력한 공권력, 그리고 선견지명을 가진 정책 입안자들의 결단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맨해튼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센트럴 파크라는 보완책을 통해, 효율성과 인간 중심적 가치 사이의 균형을 찾아낸 현대 도시계획의 중요한 역사적 사례이자, 인류의 의지로 빚어진 경제적 걸작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