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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Dec 17. 2023

마트에서 천사를 만나다.

2023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교회에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것 같은 성령 체험의 은사와 기적 같은 치유, 고민 해결의 경험이 왜 내게는 도통 일어나지 않는 걸까? 직장을 주소서, 하고 기도했더니 취업이 되더라, 병을 낫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했더니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더라, 빚을 갚는데 딱 얼마가 모자랍니다, 했더니 그날 밤에 기대도 하지 않던 사람이 찾아와 그 액수만큼 돈을 내놓고 가더라, 하는 얘기를 주변에서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별로 그런 경험이 없을까. 고민이 있어도 다 내가 해결해 낼 수 있다는 오만함 때문에 기도를 안 해서 그런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인내심과 순종을 길러 큰 사람 되라고 기도제목을 일부러 하나도 안 들어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대단한 영적인 체험을 한 적이 없다. 이러다가 정말 너무 큰 사람이 될까 걱정이 된다. 대강 소인배로 살아도 충분한데 왜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나이까, 나의 주여. 이제 좀 소원을 들어줄 때도 되지 않았나요?


   크리스마스는 예수가 태어난 날이라 기념하는 건데 요즘 세상에서는 아무래도 죄책감 없이 소비를 더 할 수 있는 하나의 구실이겠지.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이런저런 행사와 모임에 끼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선물을 사고 음식을 하며 별로 대단치는 않은 분주함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요즘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늙어가는 몸을 보살피기 위해 물리치료도 가야 하고 침도 맞아야 하고 약도 지어먹어야 된다. 침놓는 선생이 아파서 치료 약속이 취소되면 그 시간에 하다못해 흰머리 염색이라도 하러 가야 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음이 자산이라는 말에 새삼 동의가 된다. 안 아프고 머리카락도 시커먼 젊은이들은 얼마나 시간이 남아돌까! 부럽고 또 부럽다. 그렇게 며칠 전 병원 약속이 취소된 참에 염색을 하러 미장원에 가고 미장원 옆에 마침 선물 가게가 있어 생각난 김에 지인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있는데 미장원에서 준 커피를 공짜라고 너무 마셔서 그런가 배가 살살 아파 오는 거다. 선물 가게가 있는 건물 지하에 마트가 있고 그 마트 옆에 화장실이 있다고 크게 사인이 있어서 지하로 내려갔는데 화장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본 사람만이 영수증에 적혀 있는 비밀번호를 넣고 들어갈 수 있는 손님용 화장실이었다. 아니, 이럴 거면 뭐 하러 화장실이 있다고 위층에 크게 써 놨어? 배가 너무 아파 마트에 가서 뭘 사고 줄을 서서 기다려 결제하고 영수증을 받고 할 상황이 아니라 난감했는데 그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칠. 번호를 눌러요."


   화장실 앞 벤치에 한 아저씨가 앉아서 나에게 참견한다. 간절한 애원의 눈빛을 보내며 "뭐라고요?" 그랬더니 이건 비밀번호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라며 다 아는 얘기로 훈수 두고 다시 한번 천천히 비밀번호를 불러 준다. 사람이 다급하면 이렇게 외국어가 잘 들리는구나. 사투리까지 섞인 독어를 한 번에 알아듣고 비밀번호를 눌렀더니 화장실 문이 열려 "당케 쉔!"을 세 번 정도 외치고 급한 불을 끄러 들어갔다. 아내를 따라 장 보러 온 남편들이 귀찮다고 마트 안에는 안 들어가고 밖에서 아내를 기다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갖다 놓은 벤치 같은데 거기서 하염없이 앉아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들 중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 걸고 참견하고 화장실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는 선행을 베풀며 뿌듯해하는 오지라퍼 아저씨라고 혼자 멋대로 그의 캐릭터를 규정하고 피식 웃었다. 언젠가 쓰고 싶은 소설에 이런 인물을 주변 캐릭터로 등장시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공상까지 하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는데 아저씨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 여기 앉아 아내를 기다릴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혼자 장 보러 온 사람이었나 보다.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한가해 보였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사투리 섞인 독어를 잘 알아 들었지? 아무리 똥 마려운 사정이 급해도 그렇지 아저씨가 독어로 말하는데 내 귀에는 한국말로 꽂히다니... 이런 게 방언을 듣는 은사인가? 화장실 문 앞에 서기 전에는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벤치에 나타나서 훈수 두고 지금은 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다니 왜 이렇게 행동이 빨라. 참으로 희한하다. 


   얼떨떨한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그래도 화장실 주변 어딘가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남아 뒤돌아 보았다. 다시 한번 제대로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트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는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장실 앞에는 또 몇 명의 아주머니들이 비밀번호를 몰라 난감해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이건 전적으로 나에게만 찾아온 행운이었구나! 이토록 운수 대통한 날이 있다니 이런 특별대접을 받아도 될지 몰라 황송한 감정이 몰려왔다. 마트, 트램, 도서관 등 공공장소에서 마주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무례함의 특별대접을 받은 적은 많아도 이런 식의 진짜 특별대접은 극히 드물었는데 왜 하필 오늘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온 걸까. 어쩌면 그는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에나 쓸 소설의 주변 캐릭터가 아니라 오늘 내가 할 간증의 주인공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갈망했던 성령 체험의 은사를 마트 화장실 앞에서 하게 될 줄이야. 


   오늘 어쩌다 우연히 이 글을 마주치게 된 이들에게 마트 화장실 앞 천사 같은 기적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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