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국 전의 일이다. 겨울 휴가 기간 동안 스위스 산동네들 로드트립을 한 적이 있다. 로이커바트 (Leukerbad)라는 온천 마을에 들러 하루 묵으면서 야외 온천욕을 즐겼던 그때를 회상하면 고작 3~4년 전의 일인데도 정말 머나먼 옛 시절 같다. 마스크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랑 섞여 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니!
여름 성수기도 아니고 겨울철 높은 스위스 산꼭대기까지 찾아오는 관광객이 별로 없어 로이커바트의 야외 욕장은 한산했다. 초행길이라 이렇게 첩첩산중에 있는 줄 모르고 로드트립을 감행했었는데 아찔한 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흩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오 주여'를 백만 번 되뇌며 오는 길 내내 바짝 긴장했던 터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조용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그런 고요를 뚫고 내 귀에 너무 선명하게 들리는 한국말.
아주 커다란 야외 욕장에 드문드문 몇 사람이 영어로, 독어로, 불어로 소곤대고는 있었지만 남의 나라 말인지라 귀에 와서 박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국말은 아무리 내가 안 들으려고 해도, 아무리 화자가 조용하게 말해도 귀에 와서 쏙쏙 박히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 끝내주지? 달 좀 봐. 진짜 커. 원래 이렇게 달이 크게 보이나? 스위스라서 그런 건지, 산 속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네. 야, 진짜 와 봐야 돼. 너도 나중에 꼭 와라 강추야 강추."
그때 알았다. 썸 타는 사이는 절대 낯 간지러운 말들을 달콤하게 속삭이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더 무심하고 껄렁껄렁하게 툭툭 던지는 소년의 평범한 말들에 호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영상통화 화면 너머 소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활짝 웃고 있겠거니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소년은 대학에 와서 첫사랑에 빠졌을 거다. 생애 최초로 떠난 배낭여행에서 문득문득 그녀가 보고 싶다. 큰맘 먹고 거금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 온 로이커바트의 밤하늘은 지나치게 아름다워 도저히 그녀에게 보여 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결국 전화를 걸어 말한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 달을 좀 봐 (이 달만큼이나 큰 내 마음을 봐).
야, 진짜 와 봐야 돼 (아, 진짜 보고 싶다).
너도 나중에 꼭 와라 강추야 강추 (이 설산 속의 고요한 물 가운데 우리 둘이 나중에 있을까).
처음에는 조용하게 쉬고 싶은데 크게 들리는 말소리가 거슬리고, 다들 수영복 입고 있는데 전화기를 들고 있는 타인의 존재가 불편했는데 수다의 내용이 귀엽고 풋풋해서 용서할 수 있었다. 내가 연애를 하던 시절에는 없던 '썸'이라는 개념이 뭔지 몰라 '사귀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요즘 애들은 왜 그래?' 하던 꼰대가 드디어 썸이 뭔지 확실히 알게 해 줬으니 오히려 그 청년은 은인이다. 그렇게 흐뭇하게 요즘 애들의 썸을 실시간 중계로 엿듣고 있는데 갑자기 통화가 뚝 끊겼다.
"젠장, 망했다 망했어!"
혼잣말을 내뱉고 몸의 물기도 닦지 않은 채 헐레벌떡 뛰어가는 소년의 팔목에 매달린 락커 열쇠가 흔들리며 쨍그랑 경쾌한 소음만 남긴 채 어느새 그의 흔적은 따뜻한 온천물에 닿은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왜 저렇게 급하게 전화를 끊고 달려가는지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입장 제한 시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위스 스파는 시간당 요금이 다른데 아마도 배낭여행족인 그는 최소 시간에 해당하는 입장료만 내고 들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분위기에 취하고 영상통화에 정신 팔려 시간을 넘겨 욕장에 있었던 것 같다. 1초라도 시간을 넘기면 얄짤없이 1시간 요금을 다 내라고 하는 데가 스위스 아닌가. 그가 서둘러 전화를 끊고 망했다고 자책하며 부리나케 달려간 것도 당연하다. 나는 온천에 딸린 호텔에 머물렀기 때문에 시간제한 없이 일일권을 끊어 들어왔지만 그가 안 됐다기보다 부러웠다. 나이를 먹어 금전적 여유도 생겼고 '저게 바로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거로구나' 하고 같이 낄낄댈 배우자도 옆에 있었지만 첫사랑, 첫 배낭여행, 그리고 앞으로도 무수히 처음 하는 것들 투성이일 그의 청춘이 부러웠다. 아, 로이커바트의 달보다 희고 산바람보다 청신하고 물안개보다 아련한 청춘.
요 며칠 마음이 어지러웠다. 난무하는 혐오와 분열의 말들에 어지럽게 휩쓸려 나도 역시 따지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말을 할 것 같아 무서웠다. 사랑이 무얼까, 답을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니 까맣게 잊고 있던 몇 년 전 로이커바트의 신선놀음하던 소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