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에 내리는 눈 Sep 05. 2022

먼저 비를 맞는 나뭇잎의 마음으로

 마음이 복잡하여 좀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하고 집을 나섰다. 사실은 생각을 정리하기보다 아무 생각도 안 들기 바랐다. 흔히들 바보 같은 사람을 보면 ‘이런 생각 없는 녀석!’이라고 꾸중하지만 사실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잘못된 생각을 하거나 딴생각을 해서 실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아무 생각도 없긴 쉽지 않다. 아무 생각도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는 차라리 평범한 인간이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득도의 경지가 아닐까? 예전에 ‘왓 위민 원트 (What Women Want)’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었다. 우연한 사고로 인해 여자들의 속마음이 귀에 들리게 된 남자 주인공이 지나가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괴로워하다가 금발의 백치미 가득한 여성들이 지나갈 때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자 ‘진짜?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거야?’라고 깜짝 놀라 다시 쳐다보는 장면이 있다. 블론드 미녀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댄 수준 낮은 유머이긴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기란 힘든 일임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 20년은 지났지만 그 영화가 가끔 기억이 나곤 한다. 잡념들로 괴로울 때면.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우산을 챙겨 들고 나섰다. 조금 걷다 보니 어디선가 투두두둑 투두두두둑 투둑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는 떨어지는데 왜 내 몸에 와서 떨어지지 않는지, 내가 잘못 들은 걸까 하고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 있은지 몇 초나 지났을까 곧 비는 우산을 펴야 할 정도로 주룩주룩 쏟아졌다.


 그때 가로수 밑을 지나고 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의 무성한 나뭇잎 중 제일 위에 달린 것들이 먼저 비를 맞아서 그 여린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빗줄기가 약할 땐 밑에 있는 나에게까지 닿지 않았던 거다. 빗줄기가 거세어지기 전까지 그 잠시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몰랐지만 여린 나뭇잎들이 나보다 먼저 비를 맞아 주고 있었다.


 이제껏 살아온 모든 시간이 그랬겠지. 나 대신 먼저 비를 맞아 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이렇게 살아 있는 거겠지. 부모가 내게 그랬을 테고, 상사가 내게 그랬을 테고, 친구가 내게 그랬을 테고, 남편이 내게 그랬을 테고, 예수가 내게 그랬을 테지. 그래서 잠시라도 비 맞지 않고 우산을 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허락되었던 거겠지. 그걸 모르고 인생에 비바람만 잦다고 불평했구나.


 높이 매달린 나뭇잎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왜 자기만 항상 먼저 비를 맞아야 하는 거냐고, 왜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다른 나뭇잎은 없는 거냐고 신께 따져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억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람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 그 스산한 소리 사이로 신의 위로가 들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햇살이 가득한 날 너의 위에 아무도 없었기에 너는 가장 먼저 따뜻한 햇살을 맘껏 받았지.

 아이들이 웃는 소리, 자전거가 따릉 울리고 지나가는 소리, 연인의 같이 걷는 발자국 소리, 세상의 모든 행복한 소리 중 가장 높이 올라가는 것들을 오롯이 선물로 받았지.

 높이 나는 새가 쉬어갈 때 밤이슬 맞지 않게 덮는 이불이 되는 특권도 받았지.


 비가 잠깐 왔다가  맑개  . 높은 곳에 달려 먼저 비를 맞는 나뭇잎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비 오는 날 트램 정류장에서

 



작가의 이전글 설득의 기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