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얘기하니까 생각난다. 너 기억하니? 우리 대학교 1학년 때 수영 연습하러 올림픽수영장에 갔다가 나 죽을 뻔했잖아.”
지난 주말,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A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당시, 수영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도통 실력이 늘지 않던 나와 몇몇 친구들은 연습하러 잠실 수영장까지 간 적이 있었다.
“생각 나. 근데 내가 빠진 거 아니었어?”
40년 전 기억을 소환하면 이렇다. 올림픽수영장이 넓어서 연습하기 좋겠다 싶어 갔는데 사람이 꽤 많았다. 아마도 밀려 밀려 일반용 풀 끝까지 갔던 것 같다. 선수용과 일반용 풀 사이엔 경계를 표시한 줄 같은 게 있긴 하다. 그런데 내가 한 발 잘못 딛었는지 선수용 풀 쪽으로 빠지고 만다. 수심이 2미터라지만 우리 같은 초보에겐 범접할 수 없는 깊이다. 그다음부터 A와 엇갈린다. 나는 사실 A가 구해줬다는 기억이 아예 없다. 그저 한참을 허우적대다 겨우 빠져나왔고 무서웠다는 느낌만 남아 있을 뿐. 작년엔가 소설 <러브 몬스터>를 읽으며 그때가 잠시 떠올랐지만 더 생각나는 건 없었다.
A 말에 따르면, A가 허우적대는 나를 잡아 줬는데 어쩌다 자신이빠지고 말았단다.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A는 죽음까지 떠올렸다고 한다. 풀장이니까 누군가 구하러 올 거라는 희망도 있었지만, 만일 아무도 보지 못하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래도 풀장 바닥에 발이 닿으면 힘차게 딛고 올라올 수 있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아래로 내려갔지만 물 위로 떠오르게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 힘은 점점 빠지고 이제 마지막 기회다 싶을 때 배영 동작이 생각났다고 한다. 다행히 기적처럼 몸이 떠올랐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다.
“야, 그때 익힌 배영 덕분에 나 수영 시험 볼 때 박수받았잖아.”
A는 지금도 생존수영인 배영만 제대로 한다고 한다.
모든 기억은 불확실하고 선택적이다. 내가 빠졌던 건 기억나는데 A에 대해서는 이번에야 알았다.
“세상에! 내가 나쁜 애였네. 미안해.”
A의 구체적인 기억 앞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내가 허우적대다 겨우 물 위로 올라왔던 기억은 뭘까? A가 붙잡아 주기 전 짧은 순간이었던가?
아니, 나를 구해 준 친구가 빠졌는데 난 가만히 있었다고? 내가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친구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고?
내 양심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왜 까맣게 잊어버린 걸까. A가 나를 구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어서 둘 다 빠진 건 아니었을까. 그렇담 내 기억이 그 정도인 것도 이해할 수 있는데….
확실한 건 A가 빠진 게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A는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배를 타지 못한다고 했다.
나도 트라우마까진 아니어도 좁은 공간에 갇히는 듯한 느낌을 싫어한다. 게다가 물에 빠지는 상황이 추가되면 더 무섭다.
아이들 어릴 적에 캐리비안 베이에 갔다가 실내 슬라이드를 탄 적이 있다. 큰애가 고모랑 탔는데 재미있다고 하니, 엄마 체면에 무섭다고 하기도 뭐했다. 통 속에 갇히는 듯한 느낌도 싫은데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휘어진 구간이 반복되니 정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눈을 감아버렸고 내 균형 감각은 너덜너덜해졌다. 결국 마지막에 풀로 떨어질 땐 거의 거꾸로 처박히다시피 했다. 그렇게 낮은 풀에서도 빠질 것 같은 느낌을 아마 모르는 사람들은 영 모를 것이다. 아무튼 세상 용감해 보이는 나지만 이런 땐 영락없는 겁쟁이다.
지난달, 형제들과 샌디에이고 호텔 수영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수영 동작이라는 걸 해봤다. 작은 수영장이니까 세로 방향으로 헤엄치는 건 식은 죽 먹기 같았다. 발로 벽을 차고 쭉 뻗기만 해도 꽤 나아가니까 팔을 몇 번 저으면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숨이 차선지 두려워선지 끝까지 가진 못했지만 할 만했다. 옆에서 지켜본 동생도 내 수영 동작이 괜찮아 보인단다. 배운 적이 있으니 몸이 기억하긴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내겐 수영을 싫어하는 수십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 압도적인 건 어려서부터 물에 들어가는 걸 극도로 말렸던 엄마 때문이다.(당신이 고질적인 중이염을 앓고 계셨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덩달아 나도 물이 공포스럽다. 눈이 나쁜데 안경을 벗는 게 불안하다. 난 잘 안 보이는데 남들은 잘 보이는 게 억울하다. 수영한 뒤에 눈이 뻑뻑해지는 것도 싫다. 수영장 물의 찬 느낌도내키지 않는다. 수영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귀찮다. 수영한 다음도 마찬가지다. 수영장의 락스 냄새가 싫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유형을 하려면 고개를 돌려 숨을 쉬어야 하는데 이게 안 된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수영 시험을 봤는데 실패했다. 숨 안 쉬고 25미터를 죽기 살기로 헤엄치느라 힘들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못 배울 것이다….
그런데 함께 있던 큰올케는 달랐다. 분명 나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실력이었던 것 같은데 그 짧은 시간에 어찌나 집중하는지 놀라웠다.
다시, 다시, 다시! 아 이제 알겠어. 숨 쉬는 법을 알 것 같아.
엄청나게 물을 튀기며 발장구를 치다가, 다소 과하게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숨 쉬기까지 성공하는 것이었다.
올케한테 이제 손녀랑 같이 수영장에 다녀도 되겠다고 응원을 보냈다. 언니도 그 모습을 상상하는 듯 미소 지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언니도 저리 열심인데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니지 않아? 한번 해보는 게 어때?
내가 할 수 있을까. 천천히 마음을 돌이킬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어쩌면 내가 겪은 정도의 트라우마는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A도 다시 배를 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