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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ug 18. 2022

독박 돌봄이라고 투덜댔는데 마지막 기회였다

‘다정한’ 사진 한 장의 추억

그렇게 쉬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아버지는 매일 일하러 나가셨다. 작은딸을 돕겠다는 게 명분이었으나 의심스럽기도 했다. 치매를 앓는 엄마랑 계시는 게 힘드셔서 그런 게 아닐까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요양사 선생님이 점심을 차려드리고 가면, 엄마는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3~4시간가량 혼자 계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가 집 밖으로 나가시는 경우가 없었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사고는 한순간이다. 어느 날 엄마가 밖에 나갔다가 길을 잃으셨다. 한겨울에, 늘 입던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나가셨으니 누가 봐도 이상했을 터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할머니 집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모른다고 하신 모양이다. 허둥대다 넘어지기까지 하셨다. 119가 오고 경찰이 출동했다. 다행히 같은 건물에 사는 분이 동생 연락처를 알고 있어 큰 화는 면했다. 그러나 넘어질 때 팔이 접질렸는지 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병원에서 간이 깁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스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엄마는 답답하다며 깁스를 풀어달라고 성화였다. 이 방 저 방에서 가위를 찾아다녔다. 붕대 같은 깁스라 금방 풀렸다. 엄마는 아프지 않은데 왜 이걸 해야 되느냐고, 다친 적 없다고 잡아뗐다. 팔이 아물 때까지 매일 붕대를 감았다 풀기를 반복해야 했다.


불행은 연달아 온다고 하던가. 다음은 아버지 차례였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정신을 잃으셨다는데 당신도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즈음 식사를 잘 못하셔서 안 그래도 걱정이었는데 결국 일이 터진 것이다. 고꾸라지듯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퉁퉁 부었고(코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만큼),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제발 쉬시라는 딸들의 말을 그렇게 무시하시더니, 아버지의 강제적인 휴식이 시작됐다. 병원에선 연세도 있으시니까 몇 주간 입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엄마 때문에 안된다고 통원 치료를 택하셨다.


부모님 집은 예전에 지은 빌라라 욕실 문턱이 높았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한번 가시려면 목발을 짚고 문턱을 넘어야 했다. 진즉 집을 고쳤어야 했는데, 살면서 수리하는 게 번거로워 미루다 보니 불편함이 말도 못 했다. 그렇다고 몸이 아프신데 당장 수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 고생하셔야 했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에 닥칠지 모르니 무리하더라도 집을 고치는 게 급선무였다. 같이 사는 동생이 결단을 내렸다. 마침 우리가 친정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한 직후라 집수리 하는 동안 부모님을 모셔 오기로 했다.




친정에서 우리집까지는 막히지 않으면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혹시 몰라 엄마에게 팬티 기저귀를 입히고, 지루하실까 봐 트로트 음악도 틀고 소풍 가듯 집으로 모시고 왔다. 처음엔 호텔(?) 같다고 좋아하시더니, 엄마는 매일매일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집에 언제 갈 거냐고 아버지를 졸랐다.


“할아버지(엄마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다), 집에 언제 갈 거야?”

“난 일 년 여기 있을 거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집에 가야 하는데….”


친정에 자주 가 있었으니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게 걱정되진 않았다. 그런데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건 큰 문제였다. 식재료를 사다 나르는 동생이 없으니 그것도 일이었다. 하루 종일 뭔가를 하느라 동동거렸다. 독박 돌봄이 이런 건가 싶었다.


8시 30분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중에 부모님을 모시고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걷는다. 두 분 다 오래 걷지 못하시니 벤치가 있는 곳마다 몇 번씩 쉬어야 한다. 산책의 즐거움을 위해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들른다. 각자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고르시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땀이 났으니 집에 오자마자 목욕을 해야 한다. 내가 엄마를 씻겨 드리고, 아버지가 이어 욕실에 들어가신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고 심을 차린다. 입이 심심하실 테니 중간에 간식도 챙겨야 한다. 저녁은 또 뭘 먹어야 하나? 엄마는 매운 건 손도 대지 않으시고, 아버지는 식사를 통 못하시니 뜨끈한 국이라도 끓여야 한다. 엄마는 그래도 식사 잘하시는데, 아버지가 걱정이다.


하루하루 약속한 날짜만을 기다리던 때, 동생한테 연락이 왔다. 인테리어 업체에서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출 것 같다고, 시간을 더 달라고 한 모양이다.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아니 공사 기간을 그렇게 늘리는 게 말이 되니? 어떻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결정할 수 있어?”


아무런 잘못도 없는 동생에게 괜히 화를 냈다. 여태껏 부모님과 함께 산 동생도 있는데, 언니란 사람이 고작 40일을 못 참아 싫은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되레 나를 위로했다.

“언니, 난 일하고 들어오니까 엄마 아빠랑 있는 시간은 얼마 안돼. 언니는 24시간 돌보는 거잖아. 당연히 힘들지….”

‘하산’ 해도 될 만큼 수양의 정도가 높은 동생에게 졌다.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엄마,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우리 애들 키울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육아를 하면서, 아이는 나날이 진보하는데 나는 퇴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부모님의 퇴행과 쇠잔함을 지켜보자니 마음이 아팠다.

“힘들겠지만 언제 부모님을 그렇게 모셔 보겠어요?” 지인의 말에 그땐 심드렁하게 대꾸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독박 돌봄이라고 투덜댔는데 되돌아보니 부모님과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추억은 내가 찍어드린 ‘다정한’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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