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y everything Mar 28. 2023

나 하버드 학원 다닌 여자야.

3월.

정말 바쁘다.


첫 주는 개학, 둘째 주는 각종 학부모회 모집 및 학급 세우기 활동, 셋째 주는 학부모 총회(1분만 오셨지만 준비는 열심히 했다.) 넷째 주는 학부모 상담.


6학년이다 보니 2시 30분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10분 정리하고 바로 상담을 시작해서 거의 일주일 꼬박 상담을 했다. 그나마 학부모 총회 때 한 분만 오셔서 이번 주에 신청하신 상담을 미리 당겨서 해서 20분의 숨돌릴틈이 있었다.

방과 후 시간을 상담으로 꽉 채우니 수업 준비는 당연히 퇴근 이후로 밀릴 수밖에 없다. 숙직기사님의 눈치가 보여 학교에서 일을 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에 간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딸 옆에서 6학년 교과서와 지도서를 펼치고서는 열심히 연필을 굴린다. 과학 수업 준비도 만만치 않다. 비타민C 함유량을 알아보는 실험을 하라면서 너무 어려운 화학적 원리는 설명하지 말고 이해를 시키라니 고민은 또 내 몫이 된다. 결과를 해석하려면 외우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을 테니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고민 끝에 비타민C와 녹말가루와 아이오딘-아이오딘화 칼륨 용액으로 역할극 하며 설명하니 아이들이 재밌다며 난리가 났다. 재밌으라고 한 건 아니고 이해하라고 한 거지만 행복하면 됐다. 이해를 했으니 재미도 느낀 거라 믿고 싶다.




다시 상담주간으로 돌아가본다. 부모님들은 자녀의 마지막 초등학교 학창 시절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요즘 살짝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직까지는 우리 금쪽이들과 나름 선방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아서 그랬던 거구나,라고 생각하니 한여름인데 갑자기 냉기가 도는 무시무시한 느낌이다.


상담 기간 중에도 여전히 수업은 이루어진다. 1단원 분수의 나눗셈을 지나니 도형 단원이 시작되어 아이들은 한숨 돌린 눈치다. 이 기회에 부모님들이 귀띔해 주신 내용을 살살 버무려 아이들에게 던져 본다. 수학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한다니 아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이럴 때는 내 흑역사 방출이 특효약이다. 흑역사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선생님도 이런 게 고민이었다,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을 솔깃하게 만든다.



" 선생님도 학창 시절에 수학이 너무 싫었어. 잘하는 편도 아니었던 것 같아. 특히 가로수 심는 문제나(길이 몇 m인데 나무를 심으려면 몇 그루를 심을 수 있는지, 원형일 때는 어떻게 다른지), 욕조에 2개의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는 문제 같은 거 알지? "

아이들도 바로 감정이입을 하며 탄식을 한다.


"선생님은 이상하게도 학원 다니는 게 무서웠다? 그때 당시에는 시험을 봐서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기도 하고 그랬거든."

"진짜요? 그런 학원을 뭐 하러 다녀요."

"옛날에는 진짜 그랬어. 그러다 중학생이 서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다니게 됐지. 그 학원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 하버드 학원."

점점 아이들이 빠져든다.


"그런데 선생님이 3개월만 다니다 그만뒀어."

"왜요?"

"일단, 선생님이 놀려고 그만둔 건 아니야. 그만두고 선생님의 방법대로 열심히 공부했어. 어떻게 했냐면, 선생님 놀이를 하면서 혼자 공부를 한 거야. J야, 이건 이렇게 풀어야 돼. J야, 아까 풀었는데 왜 또 까먹었니? 이렇게 말이야."

아이들이 원맨쇼를 하는 중학생 시절의 선생님을 상상했는지 웃기단다.


"왜 이렇게 공부를 했냐면 수학이 어려워서 학원을 갔으니 선생님이 천천히 알려주실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안 배운 부분을 앞서서 빠르게 가르쳐 주시는 거야. 선생님이 더 혼란에 빠진 거지. 배운 것을 이해할 새도 없이 계속 배우기만 하니 과부하가 걸리더라고. 그래서 오래 걸리더라도 혼자 천천히 이해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선택한 거지."


"너희도 지금 수학 공부가 힘들 수 있는데, 틀렸다고 기죽지 말고, 잘 못한다고 기죽지 마. 틀린 걸 알아야 뭐가 부족한지 알고 공부를 하지. 그리고 학원이 만능은 아니다. 학원 다닌다고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이 없으면 소용없어. 너희 만의 공부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해."


그런데 이렇게 수학 싫어하던 선생님이 수학을 잘 가르쳐보겠다고 수학 교육 대학원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길고 긴 이야기가 끝이 난다.




다시 수업을 이어나간다.


칠판에 각기둥을 몇 개 그리며 설명하는데 아이들 눈에는 슥슥 그리는 것이 인상 깊었나 보다.

"우와, 선생님 진짜 잘 그려요. 역시 하버드."

"하버드? 그치! 나 하버드 학원 다닌 여자야!"


아이들의 말장난에, 센스에 오늘 수학시간도 웃으며 끝났다.

물론 아이들은 하버드만 기억하겠지만 말이다.







이전 05화 내 쉬는 시간 어디 갔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