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땡큐 베리 마치! 태곤!

골목 안의 기억

by 빈창숙

놀던 골목은 낮에는 모두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지. 아이들이 골목에 나와 노느라고 들락날락해서였을 거야. 우리들은 놀다가 목이 마르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물을 마셨어. "왜 들어와서 물을 마시냐?"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그 골목에서는 누가 사는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 가끔 모르는 사람이 오면 "누구네 집에 가느냐?" 묻고는 그 집까지 안내하곤 했어.


그런데 그 골목에서 유일하게 대문을 열어 놓지 않은 집이 있었어. 태곤이네였지. 태곤이네는 대문을 열어 놓지 않았어. 그렇지만 골목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예쁜 집이었어. 우리 집 오른쪽으로 또 하나의 작은 골목이 있었는데, 이 골목의 끝집이었지. 태곤이네 대문은 나무로 된 대문이 아니라 철대문이었고, 철대문 사이사이로 훤하게 마당이 다 보였지. 태곤이네는 유일하게 철대문인 집이었어.


철대문 사이로 보이는 곤이네 마당은 시멘트로 되어 있었어. 시멘트 바닥에는 연두색이나 하늘색으로 도형이 그려져 있었고, 도형 사이사이에는 흰색 선이 그려져 있었지. 마치 세계지도처럼 말이야.


이 마당을 태곤 아버지께서는 겨울만 빼놓고는 늘 호스를 길게 늘어뜨리고 마당을 물로 청소를 하곤 했어. 태곤네 마당은 늘 깨끗했고 아무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집이었어. 항상 대문이 잠겨있었지.


태곤이가 놀다가 집에 들어갈 때 가끔 혼이 나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태곤 아버지께서 물로 깨끗이 청소해 놓은 마당을 태곤이가 흙 묻은 신발 신고 들어가 더럽혀서였어. 그래서 태곤이는 놀다가도 집에 들어갈 땐 신발을 벗어서 탁탁 털고 가곤 하였지.


태곤이는 우리하고 생김이 조금 달랐어. 엄마는 우리나라 사람이었는데 아버지는 외국사람이었거든. 미국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아. 곤 아버지는 키도 크고 정말 코도 크고, 눈도 크고 , 덩치도 컸어. 그 골목에서 가장 키가 큰사람이었어. 우리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 철수야, 명숙아" 하고 '야' 자나 '아'자를 붙이는데 태곤이 한테는 "태곤" 하고 불렀지. 태곤이네 아버지와 엄마가 태곤이를 그렇게 불렀거든.


곤이는 자치기를 아주 잘했지. 자치기는 땅에 한 20cm 길이로 땅을 파서 구멍을 내고, 파 놓은 땅 끝에 양쪽을 어슷하게 깎은 나뭇가지를 꽂아 놓지. 그리곤 잡고 있는 막대기로 그 끝을 쳐서 올리고, 다시 잡고 있던 막대기로 올라온 나뭇가지를 쳐서 멀리 보내는 거야. 처음 구멍이 있던 곳에서 잡고 있던 막대기 길이로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까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는 놀이였어. 그런데 멀리 날려 보냈던 나뭇가지를 상대편이 잡으면 놀이는 끝나고, 술래였던 상대팀이 반복해서 노는 놀이였어. 지금 생각하니 야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


태곤이는 정확히 날아 오른 나뭇가지를 맞추었고 그 나뭇가지를 아주 멀리 날아가게 했어. 그래서 좁은 골목에서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자치기 하는 아이들은 연탄공장 옆의 빈 공터로 가곤 했지. 어느 누구도 태곤이를 따라가지 못했어. 자치기 할 때의 태곤이의 눈은 더 크고 빛났어. 항상 이겼거든.


태곤이는 우리와 얘기할 때와 엄마 아버지하고 말할 때 다른 말을 썼는데, 우리는 태곤이가 양쪽 말을 다 쓰는 게 신기했어. 우리나라 말을 할 때 전혀 어색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골목에서 놀 때 우리는 몇 번이나 "태곤!, 쏼라쏼라 해봐. 응?" 그러면 태곤이는 못 들은 척했지. 그리고 또 며칠 지나 "태곤!, 쏼라쏼라 해 봐." 했더니 곤인 한참이나 그냥 쳐다보고는 주먹만 꽉 쥐었어. 때리지는 않았지. 그 후로는 태곤이에게 '쏼라쏼라' 하라고 하지 않았지.


그때 나는 4학년이었고 곤이는 3학년이었어. 1961년도였네. 아직도 그 아이의 눈이 생각나. 소의 눈 같다고도 생각했고, 내가 더 커서 태곤이가 생각날 때는 사슴눈 같다고도 생각했지. 태곤이의 눈은 크고 눈 속에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이 같았어. 그리고 말도 많지 않았고 친구들과 싸우는 일도 없었어. 늘 양보를 했지.


어느 날 저녁에 우리와 놀다가 집에 들어간 태곤이가 아버지께 호되게 맞는 소리가 들렸어. 우리 집 마루 위에 열려 있는 창문으로 들려오는 태곤이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태곤이 엄마의 알아들을 수 없는 큰 소리가 들렸지. 나는 무서웠어. 그래서 그날 저녁은 덩달아 엄마의 말을 더 잘 들었어.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골목에서 노는 데 태곤이가 보이지 않았어. 엄마의 얘기로는 우리들이 학교에 갔을 때 태곤이 엄마가 집 밖을 나서다 앞집 반장 할머니를 만났는데 눈

이 멍이 들어 있더래. 그래서 반장 할머니가 태곤이 엄마한테 자초지종을 물으니 어제 태곤이가 놀다 와서 손을 씻지 않았다고, 말을 안 듣는다고 태곤 아버지가 태곤이를 때렸고, 곤이를 말리다가 곤 엄마까지 맞은 거였어.


그 골목에서 반장 할머니는 욕 잘하기로 소문이 나있었고, 버릇이 없는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했어. 동생들이 말을 안 들으면 엄마는 동생들에게도 반장 할머니한테 이른다고 했고, 그 말을 들으면 동생들은 무서워서 말을 잘 들을 정도였어. 반장 할머니는 골목에 사는 아이들 모두 무서워하는 할머니였어. 나 어렸을 때 무서워하던 망태 할아버지보다 더 무서웠지. 왜냐하면 망태 할아버지는 불러도 오지 않았지만 반장 할머니는 부르면 언제든지 오셨거든. 반장 할머니는 내 친구의 엄마였지만 나이가 많아 우리들은 반장 할머니 또는 닭장 할머니라고 불렀지. 집에서 닭을 키우고 있어서야. 이 반장 할머니는 골목에 사는 사람을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어.


태곤 엄마의 멍든 눈을 보고는 반장 할머니는 싸리빗자루를 들고 태곤이네로 달려갔다는 거야. 태곤이 엄마가 팔을 잡고 말려도 소용없이 태곤네의 문을 두드렸데.


"헤이! 헤이" "나와봐라. 문 열어라" 하고 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엄마도 무슨 일인가 나가보고, 골목에 있는 아줌마들도 다 나와버린 거지. 당황한 곤 아버지가 나오고 반장 할머니는 싸리 빗자루를 흔들어 대며 큰소리로 혼을 내신 거야.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때려도 되는 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얼굴을 만들어. 부부면 감싸줘야지." 그 소리에 태곤 엄마는 옆에서 울고 있었데. "아무리 양코 베기 사람이라지만, 때리면 아프다는 것은 알아야 사람이여!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야." 이랬다는 거야. 반장 할머니는 정말 이름만큼 반장 역할을 하신 거야. 든든한 친정식구 역할까지. 엄마의 말씀으로는 반장 할머니가 그때처럼 멋있었던 적은 없었데.


태곤이 아버지는 반장 할머니 말을 다 알아들은 것처럼 "쏘리, 쏘리"를 연발했고 두 손을 싹싹 빌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 외국인이었던 태곤이 아버지는 몰랐을 거야. 우리나라 골목은 때로는 한 가족 같은 공동체라는 걸. 누구네 집이 그날 밥을 굶어 배를 곯았고, 누구네 집에 손님이 오고 누가 뭐 때문에 아픈지 다 알고 사는 세상인걸 말이야.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태곤이네 집의 마당에는 예쁜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어 있었어. 우리들은 난생처음 본 크리스마스트리를 철대문 사이로 구경만 했지. 크리스마스트리는 밤엔 정말 휘황찬란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몽땅 빼앗아 갔어. 그렇게 예쁜 모습은 난생처음이었거든.


그런데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골목에 나타난 거야. 크리스마스 저녁에 곤 아버지는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골목 전체 아이들의 집을 전부 돌아다니시며 선물을 나눠주셨어. 태곤이가 이쁘게 포장된 선물에 아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놓았고, 태곤이가 그 이름을 불러주면 태곤 아버지께서는 또 한 번 선물 받을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선물을 하나씩 나눠 주셨어.


나는 그때가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거였어. 내 것은 하얀 스케치북이었어. 정말 좋았지. 아마 태곤이가 내가 인형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 인형이 없어져 속상해한 것을 태곤이는 알고 있었나 봐.

그때 선물 받고 좋아했던 기억이 60년이 지나도 생생하네.


그다음 날 골목 안의 친구들은 어제 받은 선물들을 서로 자랑하며 환호성을 질렀지.


"이것 좀 봐. 태곤! 네 아버지가 내가 이걸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와! 정말 좋아"

"나도야. 나도 이걸 갖고 싶어 했는데."

우리는 서로 무슨 선물을 받았는지 서로 보여주며 자랑을 했어. 그 골목에서 모두들 크리스마스라고 처음 받아 본 선물이었으니까!


선물은 태곤 아버지께서 준비하셨겠지만, 태곤이가 그 골목의 아이들이 평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갖고 싶어 했는지 다 알고 얘기해주지 않았을까 해. 태곤이는 우리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우리들이 정말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곤이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외쳐댔지.


땡큐! 땡큐 베리 마치! 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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