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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바뀌었다

by 동화작가 몽글몽글

- 안 믿기겠지만 오늘이 입추랍니다

그날 아침 지인이 더위 속 입추 소식을 올려주었다. 파란 하늘 아래 빨간 코스모스 몇 송이가 하늘거리는 그림과 함께.


- 입추라니! 가을을 생각해 봅니다

이 말을 하며 입추라고 말하는 입술 끝에서 가을바람이 시작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했었다. 절기란 걸 잊고 살기도 하고 또 더위가 웬만해야 글자 끝에라도 가을을 묻혀 보지만 여름이라고 하기에도 무서운 날씨 앞에서 늦여름도 상상이 되지 않던 아침이었다. 그런데 저녁부터 바람이 바뀌었다. 마치 입추날 저녁부터 그렇게 하자고 마음이라도 먹은 것처럼 종아리에 감겼다 가는 바람이 달라졌다. 발끝에 닿아도 걸리적거리기만 하던 이불자락을 새벽녘에는 슬며시 잡아당겼다.


- 너의 능력 안에 있는 것과 너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을 구분해라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날씨나 기후는 이미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무섭게 퍼부어 대거나 안 오거나 둘 중 하나인 여름비도 나의 능력 밖이다.


- 하느님이 구름판 위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나 보다

로 표현하던 어떤 아이의 여름 동시처럼 올여름 태양은 햇빛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뭔가를 익힐 수도 있는 강력한 화력을 가진 존재로 보인다. 자연은 무섭다가 또 다정하다. 인간이 주고받은 입추라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바람 한 자락을 쓱 풀어놓고 간 듯하니 말이다. 그런 다정한 여름이라면 처서 때는 모기 입이 돌아갈 거고 백로에는 아침 절에 하얀 이슬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추분이면

- 이제 아폴론의 바퀴가 부서졌는지 낮이 너무 길다

는 돈키호테의 말이 쏙 들어가고 잘 고쳐진 아폴론의 바퀴가 낮과 밤을 똑같이 양분해서 굴러가게 할 것이다.

내가 조바심을 내건, 내지 않건 시간은 제 속도대로 간다. 여름이 어떠하건, 날씨가 어떤 모습이건 가을은 무조건 여름 후에 온다. 그 순서 지켜짐에 감사하고 기다리다 보면 사람만큼 힘들었을 곡식, 과일들이 같은 여름을 이겨내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 가을아, 하고 부르니 내 친구 김가을이 온다

고 하던 2학년 윤지의 동시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되는 아침, 그래 이 여름, 내 얼굴에 기미만 올라오랴! 진초록 저 잎사귀에도 누르끼리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다. 잎사귀 안에는 이미 가을 들어가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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