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너머로 선생의 눈길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게 된 후 나머지 감각 기관은 오히려 예리해진 면이 있다. 공기를 타고 육감의 촉수 끝에 선생의 응시가 걸려들었다. 내가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길 기다리는 듯했다.
“매일 차 드시러 오시지요.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가 뭐라고 입모양을 만들기도 전에 동생이 엎어지며 인사를 하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일 같은 시각에 들르겠단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뭘 매일 차를 마시러 저 꼭대기까지 가냐. 난 차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언니,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가. 선생님이 내주시는 차는 보통차가 아니야. 귀한 약이야. 기력이 회복된다고 하셨으니까 어쩌면 시력이 돌아올지도 몰라.”
동생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번 웃자고 한 짓인데 동생은 웃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리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동생을 보면서 마음 한편에 혹시나, 하는 엉뚱한 기대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면 하루아침에 보이지 않게 된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거꾸로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다음 날 다시 선생을 방문했을 때 탁자 위에 여러 가지 다구들이 놓여있었다.
“옆에서 도와주며 함께 하시지요.”
“네 선생님.”
동생이 옆으로 바짝 붙어 앉으며 편하게 놓여 있는 내 다리를 쿡 찔렀다. 쳐다보니 동생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었다. 얼결에 등을 곧추세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생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을 하는 것으로 다례를 시작했다. 어정쩡하게 맞절을 하며 속으로는 한시바삐 자리를 뜰 궁리 중이었다. 편히 앉으라는 선생의 말에 쥐가 날 뻔 한 다리를 후딱 풀었다.
물이 끓자 선생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찻물에 적합한 온도가 될 때까지 뜨거운 물을 한 김 식힐 동안 다구를 헹궈내고 잔과 주전자를 데웠다. 마지막으로 우려낸 차를 잔에 나누어 부으며 다례가 끝이 났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선생의 모든 행동이 간결하면서 박진감이 넘쳤다. 코끝에 전해지는 진한 차 향기를 가르며 들리는 쪼르륵 물 붓는 소리, 달그락 거리는 그릇소리와 함께 손이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연상되었다.
차 향기에 취한 건지 고수의 손놀림에 혼이 쏙 빠졌던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차 다섯 잔이 가지런히 내 앞에 놓여있었다. 차를 마시라는 말에 누구라도 먼저 잔을 들길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혼자 다 드셔야 합니다.”
동생이 차례로 찻잔을 들어주고 다 마신 잔을 받아주었다. 차 종류는 계속 바뀌어 백차, 녹차, 황차를 거쳐 청차, 홍차, 흑차에 다다랐다. 차가 바뀐 것을 동생이 굳이 알려주지 않더라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차마다 독특한 향기를 풍겼다.
미각으로 느낀 차 맛은 더욱 다채로웠는데 혀뿌리 쪽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쓴맛부터 혓바닥 전체를 오그라들게 하는 떫은맛과 혀의 옆구리에서 지근지근 올라오는 신맛에 혀끝을 감싸는 단맛과 입 안 전체에서 어우러지는 감칠맛까지 잘 짜인 풀코스 요리를 먹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식음료 정찬은 무려 백 잔을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백 잔. 한 잔에 50 밀리리터라 치면 장장 두 시간에 걸쳐 5리터의 물을(물만) 마신 셈이다. 마신 물의 양만 따지면 평소 배뇨장애가 있는 내 방광이 터져도 벌써 터졌어야 한다. 커피를 마시고 곤란했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닌데 놀라운 건 5리터의 물을 마시고도 지금 방광이 잠잠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차를 마시기 전보다 몸이 더 가벼워진 기분마저 들었다.
“신체뿐만 아니라 기운이 극히 마른 상태입니다. 가뭄에 내린 단비가 달 수밖에요.”
처음으로 선생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내일 오실 때 벌을 몇 마리 가져다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생이 그러겠다고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땠어?”
“어, 차를 그렇게 많이 마실 줄은 몰랐지. 기분 탓인가 몸이 좀 가뿐한 것도 같고.”
“좋은 조짐인데.”
“근데 벌은 왜 갖다 달라고 하는 거야?”
“어, 어. 뭐.”
동생은 대답인 듯 대답 아닌 듯한 말로 얼버무리며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