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보와 다르게 태풍은 내륙에 도착하자마자 시들시들 힘이 빠져 다행히 봉장에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고 지나갔다. 벌에 쏘인 눈은 밤새 부풀 대로 부풀어 위아래 눈꺼풀이 들러붙어버렸다.
“같이 갈 데가 있어.”
“어디?”
“선생님 뵈러. 하필 눈을 쏘여서. 걷기 힘들겠다.”
“위쪽에 또 누가 살아? 더 올라갈 데도 없어 보이던데.”
“선생님 댁이 끝집이야.”
헛디디지 않으려고 동생 손을 꽉 잡고 걸었다. 어렸을 때 내 손에 매달리던 동생이 기억에 가물가물한데 정작 맞잡은 동생 손은 내 손을 다 덮을 만큼 크고 까슬한 손바닥은 따뜻했다.
길은 선생 집 마당으로 이어져있었다. 의외로 완만한 길에 폭신한 야자매트까지 깔려 있어서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해 보니 이런 깊은 산속에 어울리지 않는 번듯한 집이었다. 잡동사니를 그러모아 막 지은 누더기 같은 집을 상상하고 있던 나로서는 괜한 실망감마저 들었다.
집주인이 미치광이와 도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작자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집을 보니 의외로 멀쩡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졌다. 때마침 현관문이 열렸다.
“선생님, 계셔서 다행이에요. 허탕 치면 어쩌나 하면서 왔는데.”
“어서 오세요.”
저 사람이 선생?
집주인의 목소리가 예상 밖으로 너무 젊었다. 산속에 혼자 사는 데다 가뜩이나 호칭을 선생이라고 해서 사뭇 허옇게 기른 수염에 쑥대머리를 한 사람 형상을 기대했는데 내 예상이 연거푸 깨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분이 그럼?”
“네, 제 언니예요.”
“눈이......”
“아, 아니에요. 어제 벌에 쏘여서 그런 거예요.”
“그럼 다행이군요.”
선생의 말투로 보아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선생 뒤를 이어 동생과 내가 들어서고 현관문이 스르륵 닫히자 등 뒤로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끼쳐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에 만져지는 마루며 가구들이 반질반질 잘 손질된 느낌이었다. 집에서는 투박한 흙내가 아니라 은은한 한약재 향이 배어났다.
“차 한 잔 드시겠습니까.”
“너무 좋죠. 선생님 차는 보약인데요.”
내 의사 따위는 묻지 않고 동생이 냉큼 대답해 버리는 바람에 난 이왕이면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은 하지도 못했다. 하긴 이런 곳에 커피 같은 도시 물건 나부랭이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선생이 차를 우리기 시작하자 집안을 떠다니는 약재 냄새를 뚫고 코 속으로 깊숙이 차향이 들어왔다. 눈꺼풀 틈으로 질금질금 새는 눈물을 훔치며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우스운 상황을 깜빡할 정도로 강렬한 향이었다.
“차향이 정말 진하네요.”
“야생차라 일반 차향이랑은 좀 다를 겁니다. 드셔보시지요.”
선생이 권하는 대로 차를 한 모금 삼키자 진득하고 묵직한 차 기운이 목덜미부터 말단까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