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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Mar 01. 2020

동생



바로 다음날 동생 부부가 나타났다. 이삿짐센터 직원처럼 등장한 둘은 집안으로 들어와 당장 필요한 물건들만 골라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말릴 기운도 거들 기운도 없어서 마지막에 나갈 짐처럼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서 지켜만 보았다.


이방 저 방 본격적으로 집을 털기 시작하자 동생은 연신 '세상에!’를 외치고 다녔다. 맨 처음 드레스 룸을 열어젖히고 ‘세상에!’를 외치더니 ‘하나도 입을 게 없네. 이렇게 입고 벗기 불편한 옷은 거기선 쓸모가 없어.’라는 말을 덧붙여 내 월급의 대부분을 잡아먹은 소중한 컬렉션들을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신발장을 열고서도 똑같은 말로 콧대 높은 내 킬 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줬다.
옷장과 신발장을 무찌른 다음 동생은 격전지를 주방으로 옮겼다. 수북이 쌓여 있는 배달음식 용기들을 분리수거한 뒤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싱크대 아래쪽 문을 열어보고 아까보다 더 격하게 감탄하며 방치돼 있던 꿀병을 하나 둘 소중히 꺼내서 가져갈 짐에 챙겨 넣었다.

동생은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견했던 사람처럼 자기 남편에게 지시를 해가며 재빠르게 짐 정리를 했다. 몇 시간 만에 얼추 정리가 됐는지 동생은 마지막으로 나를 챙겨서 집을 나왔다.


차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생명줄 같이 붙잡고 있던 사직서를 낸 데다 동생이 와 준 덕분인지 그동안의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려 깊은 나락 같은 잠에 빠졌다. 얼마쯤 잠이 들었을까? 차에서 내린 기억이 없는데 눈을 떠보니 사방이 하얀 텅 빈 방안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소리쳐봐도 내 목소리만 왕왕 울리며 되돌아왔다. 안 보여서인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잔뜩 움츠러들어서 주위를 살피는데 멀리서 희미하게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앞에서 멈췄다.

"누구세요? 대체 여기가 어디죠?"

구두소리 주인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연거푸 물어대자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뱉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 그렇다면 알려주지."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팀장님?

정말 팀장이었다. 그는 높은 구두를 신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으니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무슨 영문인지 저 구두가 내 것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한 중년 남자는 킬힐을 신고 자신의 키가 10센티 이상 높아지자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듯했다. 어떻게 내 구두를 돌려달라고 말할지를 골몰하던 중에 팀장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원단은 준비된 건가? 업체에서 흰색이 아니라 아이보리색으로 바꿔 달라고 한 거 확인했나? 저번에 60수 아사랑 섞여 들어가는 바람에 곤란했던 거 기억하고 있겠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단! 원단이 어디에 있더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내 말을 알아듣고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하얀색 벽을 가리켰다.

아. 저 하얀 게 원단이었구나.

그러니까 여기는 원단창고였다. 내 눈으로 그게 40수 트윌 면인지 60수 아사인지 혹은 흰색인지 아이보리색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벽에 다가가 코를 바짝 붙여 봐도 무지인지 패턴인지 조차 가늠이 안 됐다. 잘 보려고 애쓸수록 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안 보여요.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내내 그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이번에는 팀장이 냉큼 대꾸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앞으로 네 자리는 저기야."

말과 동시에 그는 하이힐을 높이 치켜들어 내 등을 걷어찼다. 그러자 갑자기 발밑이 낭떠러지로 변하면서 나는 끝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언니, 언니. 괜찮아?"

동생이 나를 흔들어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래. 세상에 땀 좀 봐."

꿈?

왠지 등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손에 쥐가 났다.

한바탕 땀을 흘려서일까. 차창문 너머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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