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할 것도 없이 회사에 전화로 병가를 냈다. 설명하기조차 황당해서 급성 위경련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이라는 못마땅한 팀장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둘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다리나 팔 하나쯤 부러진 경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화를 끊고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씻는 동안 모든 욕실 용품을 더듬거리며 집어 들어 눈앞에 들이대서 이게 그게 아닌 걸 확인하고 내려놓고 다시 집어 들고를 반복했다. 화장 따위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거울 앞에 얼굴을 붙여야 겨우 이목구비 확인이 가능한데 그 틈으로 각종 도구들을 집어넣어 눈 코 입을 그리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20살 이후 처음으로 민낯으로 외출을 했다.
지나다니는 길에 늘 보이던 집 앞 안과에 가려고 나섰다. 그러나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것 같던 곳을 막상 눈 감은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자 찾아가는 길이 매우 험난했다.
대문을 벗어나자마자 첫 번째 난관이 닥쳤다. 매일 습관적으로 누르던 엘리베이터 1층 버튼을 찾을 수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각층 버튼을 코로 지그재그로 훑어 내려가 1층을 찾아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번엔 계단이 문제였다. 급할 때는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데를 난간에 매달려 게걸음으로 한 층계씩 발로 더듬어내려가야만 했다.
상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번 더 숫자건반을 코로 연주해 5층 버튼을 누른 후에 안과에 들어설 수 있었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대기 환자가 아무도 없었다.
의사는 내 설명을 귀로 들으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한 번 갸웃하고 육안으로 내 눈을 잠시 살피더니 다시 왼쪽으로 갸웃했다. 알 수 없는 몇 가지 기계들로 검사를 하고 나서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신음소리를 냈다.
"흐음...... 이상하네요. 안보이실 리가 없는데. 정말 안보이시는 거, 맞죠?"
나는 의사가 적어준 진료의뢰서를 들고 병원을 나왔다.
지역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원래 대학병원이란 구중궁궐 깊숙이 터를 잡고 있기 마련이라 목적지를 찾아가기까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전화기너머 기계소리가 시키는 대로 각 단계를 거치며 마침내 도착한 마지막 관문에서 처음으로 사람 목소리를 듣고는 허탈해졌다.
"3일 후가 가장 빠른 날이네요. 당연히 당일 접수는 안 됩니다."
내 상태를 모른 채로 단 1분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검색을 해서 시내에 있는 다른 병원을 가려고 택시를 탔다.
도착해 보니 빌딩 한 채를 통째로 쓸 정도로 규모가 큰 병원이었다. 나처럼 앞을 더듬거리며 오는 환자가 종종 있는지 안내직원이 손수 엘리베이터에서 접수층 버튼을 눌러줘 볼썽사나운 코연주를 피할 수 있었다. 전에는 사소해 보이던 행동이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큰 친절로 변신했다.
밤새 시력을 도둑맞은 나보다 급한 환자가 또 있을까 싶었지만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1시간 넘게 대기하고서야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는 내가 들고 온 진료의뢰서를 읽으며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내 눈을 살폈다. 가까이 마주한 의사는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처럼 퀭하고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본인이 눈병이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쳐갔다.
그는 내 눈을 잠시 살피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까도 본 것 같은 몇몇 기계들로 진찰을 하고 나서 어쩐지 귀에 익은 신음소리를 냈다. 간호사 손에 이끌려 나와 이방 저 방 다니며 이런저런 기계들로 검사를 마친 후에 다시 의사에게 되돌아왔다. 그는 한참 동안 컴퓨터를 들여다보더니 마침내 메아리 같은 말을 뱉었다.
"안보일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요. 왜 안 보이세요?"
환자에게 왜 아픈지를 따져 묻기를 서슴지 않으며 제 본분을 망각한 의사는 점점 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고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은 오그라들고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