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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Feb 28. 2020

퇴사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월요일. 대학병원 진료예약을 했다. 회사에 상황을 사실대로 말하고 휴가를 냈다.
‘지금 자리를 비우면 어쩌자는......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겠는데 나중에라도......’ 팀장은 끝을 우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 말이 앞뒤가 바뀌어 내 귀에서는 ‘나중에 네 자리는 어쩔 수 없겠는데’라고 조합됐다.

화요일. 예약일 이틀 전이다. 자고 일어났지만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수요일. 예약일 하루 전이다.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


목요일. 접수를 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입이 바싹 말랐다. 병원에서 진찰과 검사를 하는 내내 어쩐지 불길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안과 의사들 사이에 '이런 곤란한 환자 응대법'같은 매뉴얼이라도 있는지 하나같이 앓는 소리를 내며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사는 나중에는 아예 내 쪽으로 컴퓨터 화면을 돌리더니, 보다시피 모든 검사 결과치로 봤을 때 절대 안보일 수가 없다며 애원조로 말을 했다. 나는 그 검사 결과치라는 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고 의사는 '기다려 보자’는 소용없는 소리를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치료와 처방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안경조차 맞출 수 없다는 건 충격이었다. 시력이 너무 낮아서가 아니라 남들 눈에 내 눈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돋보기만 한 안경을 흉해서 어떻게 쓰고 다닐지 철없이 걱정했을 때가 좋았다.

금요일.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토요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갔다.
저녁에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 귀에 또 '네 자리는 어쩔 수 없겠는데' 하는 환청이 들렸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언제 돌아올지, 영영 안 돌아올지 모르는 눈 뜬 장님 같은 처지로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버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트북에 붙어서 더듬더듬 한자씩 사직서를 써 내려갔다.


팀장은 내 꼴을 보고 말문이 막힌 듯했다. 입사 이래 처음 보는 민낯의 호빗족이 제 키의 일부분이던 킬힐마저 벗어던진 몰골로 나타나자 일말의 원망도 소용이 없게 됐다는 걸 인지한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코를 박고 더듬거리며 물건을 상자에 담기 시작하자 옆자리 직원이 눈치를 보며 도와주었다. 진행하고 있던 일들을 동료에게 인수인계하고 묵묵부답으로 서있는 팀장에게 후임자가 오면 한번 들르겠단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등 뒤로 팀장의 깊은 탄식 소리가 들렸다.

챙긴 물건을 담은 상자를 안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동안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인사를 했다. 그들 중 몇몇은 아는 목소리고, 누구인지 모르겠는 목소리도 있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호기심에 찬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그냥 다 무시하면서 회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아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짠 수영복처럼 진이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실감 났다.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전화 벨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동생이었다.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고 있던 터라 오늘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생 부부는 얼마 전만 해도 서울에서 둘 다 공무원 생활을 했었다. 도시에 사는 여느 맞벌이 부부처럼 항상 바빴다. 사는 곳이 서로 멀기도 하고 시간적 여유가 없기로야 나나 동생이나 마찬가지여서 명절이나 돼야 가끔 만나곤 했었다. 피차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생각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귀농을 한다고 알려왔다.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는데 동생은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나에게 소식을 전한 거였다. 그러고 바로 무주에 들어가 양봉을 시작한 지 벌써 두 해째 이다. 동생이 보내준 개봉도 하지 않은 꿀병들이 싱크대 아래쪽 깊숙이 들어 있다.


"어, 언니 전화받네. 몇 번이나 전화했었는데 왜 연락이 안 됐어? 많이 바빠? 괜히 무슨 일 있나 걱정했잖아."

봇물 터지듯 안부를 물어대는 동생의 목소리가 오늘은 성가시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어도 동생 혼자서 쏟아내는 자기 할 말들이 내게로 들어와 더운 숨이 되어주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나 앞이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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