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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네스 Feb 14. 2020

별 별 일 있는, 별 볼 일 없는

20대의 나를 돌아보며

20대의 나는 사회 진출에 대한 꿈이 컸다. 아니, 욕심이 컸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대학 진학까지의 노력이 허투루쓰이지는 않겠다는 확신에 차서 '회사원이 될까? 전문직이 될까? 공무원이 될까?' 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주변의 선배들이 취준에 울고 웃는 과정들을 지켜볼 때마다 고3 수험생이 되기 전까지는 수능이 남일처럼 여겨지던 그 시기처럼 막연하기만 했다.


막상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취준에 실패했고, 졸업한 뒤에도 취준을 위해 달려야 했으며 졸업 후 수개월이 지난 뒤 기대 밖의 어느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대학 진학 후 전공공부보다는 인생경험이 중요하다며 학점관리를 소홀히 했고, 남들 다보는 시험은 보지 않겠다며 전문직이나 공무원 시험준비도 해본 적이 없다.  어찌보면 정저지와했던 나에게 당연한 결과였지만 당시의 자존심세고 욕심많은 나로서는 이 회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 대신에 사회의 부족함을 탓했고, 그만큼 내가 속한 새로운 사회에서 도태되었다. 그 시기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예상치도 못했던 직무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고 사람들과 친목을 다지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내 선택에 대한 불만족으로 사회에서는 부적응자가 되었고 회사에서는 관심병사가 되었다. 


2년 반 정도를 허송세월보내면서 회사도 나도 곪아갔다. 아침마다 출근이 지옥같았고 점심시간이면 1분을 앞다투어 회사를 벗어나 헬스장이며 카페를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칼출근과 칼퇴근의 남부러운 워라벨을 지속했지만 회사는 내게 실패를 알려주는 공간이었기에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그 회사가 상대적으로 내게 불합리한 것들을 요구했는지 그 이후 경험에 미루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단지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내 마음의 문제였다.


좌우지간 나는 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과정에서 문화예술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갔다. 내 동료들이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분야였고 막연히 드는 이미지는 고상하게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국가 전문자격증을 공부했고 학예사로서의 길에 접어들었다. 시험을 치루자마자 회사는 그만두었다. 팀장은 이미 내가 회사를 떠날 것을 예감한 듯 손쉽게 나를 보내주었다.



운이 좋게도 합격발표가 나기 전 합격한 첫 미술관에서 나는 내 우물의 한계를 보고야 말았다. 면접 본 당일부터 오후 10시까지 음식 서빙을 하며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나의 결심이 헛되지 않았음을 정당화해야했다. 연봉이며 복지수준이 열악했고 오너의 언어적, 비언어적 폭력이 난무했지만 버텨야만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새로운 직장은 내 도전을 무참히 짓밟았고, 비참하게도 나는 내가 특별하지 않음을 인정해야했다.


그 미술관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사무를 보는 것은 '일을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우리는 매번 뛰었고, 뛰는 척을 했다. 언제 급습할 지 모르는 오너를 위해 매번 창고를 정리하고 짐을 옮겼다. 당번을 정해 화장실을 청소하고 카페 업무를 돌봤다. 오너의 개인적인 축하파티-그녀는 행사라고 부르는-에서 술을 따르고 음식을 만들어 날랐고, 나의 일은 매번 주방장, 카페직원, 비서, 집사와 함께했다. 그곳에서 학예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나의 삶과 목표를 흔들었고 매번 힘이 들게 했다.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버틸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도전으로 산업분야와 직무가 전환되었고 그 길을 걸은지 고작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의 삶이 특별하지 않았음을 인정했지만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은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남들보다 못하지는 않았어야 했다. 그러던 나의 일상에 결혼은 축복이었고 돌파구였으며 안식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약속하면서 내 인생에서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고 행복했다. 


결혼을 속삭이는 시기에 나는 부득이하게 제주도 근무발령을 받았다. 3개월 간 예비신랑과 떨어져있어야 했지만 결혼을 다짐받은 후라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예비신랑도 내 상황을 이해해주었고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는 듯 했다. 양가 부모님의 흔쾌한 허락으로 약속된 우리의 결혼식은 당일까지 순항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주도로 넘어가는 차 안에서 오너는 나의 변화를 눈치챈 듯 평소 물을 일이 없는 사생활을 물었다. 

"너 결혼하니?"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미 결혼에 들떠있는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가장 큰 생각은 '결혼은 경조사'라는 것이었다. 어린 나로서는 결혼한다는 것만큼 남들에게 축하받을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으랴는 생각이 컸다. 그 질문에 긍정으로 답하면서 오너에게도 축하를 바랐다.



그 답은 나의 사회생활에서 2번째 암흑기를 가져왔다. 오너는 그때부터 결혼에 들뜬 내 기분을 바닥 아래까지 끌어내리며 끝장을 보려는 듯 했다. 3개월의 기약은 깨지고 나는 5개월, 6개월째 서울 복귀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오너가 제주도로 오는 날이면 무섭게 얼굴이 일그러진 그녀와 개인면담을 진행해야 했다. 면담의 주제는 오로지 나의 퇴사였다.


퇴사의 이유는 다양했다. 처음에는 '결혼생활과 회사 일 병행이 힘들 것이다'면서 나를 위로했다. 나의 의지가 완강하자 '결혼한 여자가 굳은 회사일을 견뎌야 하는 걸 나(오너)는 보기 힘들다' 또는 '내 마음이 불편해서 너를 못보겠다'라는 이유로 나를 설득했다. 내 머릿 속에서 결혼과 퇴직은 등식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결혼과 신혼여행 소식들은 퇴직과 같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건너건너의 누구들은 회사에서 주는 '결혼휴가'로 당당히 혼인을 마치고 회사에 복귀했다. 


오너는 서울가는 날짜만 세며 발을 구르던 나를 다른 방법으로 뒤흔들었다. '서울은 더이상 학예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던지 '서울에서 하던 사업을 철수하겠다.' 정도의 이유로 제주도 장기출장을 결정지었고 아예 나의 근무지를 제주도로 발령시켰다. 때때로 퇴사를 권유하며 '너를 믿고 업무를 맡기기엔 너의 능력이 부족하다.'던지 '너는 열심히만 할 뿐 회사에 도움이 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노동법이며 다양한 사례를 찾아보았으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제주생활을 이어가느냐, 남편을 따라 퇴직하고 서울에서 다시 시작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고민은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았고 나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가엾게 여겼다.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2019년에 봉착한 현실이라는 점을 감안해 봤을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였던 결혼이 나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생각하여 더욱 참담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제주도 사업장의 직원인 오너의 조카며느리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복귀하였다. 심지어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다고 하여 제주도 상업장 한켠에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밤낮이 뒤바뀐 아이는 일하는 내내 미술관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아이의 엄마는 근무시간의 8할을 아이돌보는 업무에 집중하였다. 단축근무도 시행되었다. 물론 아이를 가진 자에 한정해서 였다. 상황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만 만들었다.


식장을 잡았다. 역설적이게도 운이 좋아 5월에 예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제주도에 있었다. 퇴근 후 함께 사는 직원들의 눈과 귀를 피해 5분-10분 정도 하는 예비 신랑과의 통화에도 점점 짜증이 늘었다. 결혼보다는 결혼으로 인해 변한 내 처지가 더 불쌍했다. 여전히 나는 이기적이었다.



제주도에서의 휴가도 점점 줄었다. 업무의 할당도 줄었다. 나는 군식구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보고 씁쓸히 웃으며 여기저기를 청소한다던지 유물의 상태를 기록한다던지 전시장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귀에서 피가 나도록 우는 아이와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모습이 보기 싫게만 느껴졌다. 내 상황과 비교가 되어 더욱 미워졌다. 


결혼을 1달 앞두고 나는 결국 회사에 굴복하였다. 퇴직서류를 작성하는 나에게 실장는 결혼 축하한다며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 조건으로 나는 정규직으로 작성되었던 근로계약서를 계약직 근로형태의 계약서로 바꾸는 것을 허락해야했다. '계약 기간 만료로 인한 퇴사'는 실업급여를 받으려는 나와 문제없이 퇴직처리를 시키려는 회사의 입장을 모두 만족했다.


덜 익은 제주 감귤밭의 공기보다도 더 시고 떫은 나의 제주도 생활이 끝났다. 나의 기혼생활이 조금은 나아지길 기도하며 정규직이었지만 계약직으로 마무리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주일은 매일을 울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 후에는 준비안된 결혼식을 마무리 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우습게도 미술관에서 2년동안 치뤄온 행사경험들은 정작 내 결혼 준비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나는 동종업계 다른 미술관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 시 2주간의 공백을 언급하였으나 그것이 결혼식 때문이라는 점은 밝히지 않았다. 한번의 경험 후, 내 결혼이 나와 관계한 모든 이의 축하를 동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회의 편견과 냉혹한 현실에서 나는 정직할 수 없었다. 


면접의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매번 운이 따랐다. 절망 속에서 핀 꽃은 다시끔 내 정신을 바로 잡았다. 합격 후 바로 일을 시작하면서 그 주 주말에 결혼식을 올렸다. 다행히 나와 남편의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짧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미리 약속된 2주간의 휴가는 결혼생활 동안 유일하게 환상에 젖어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동경했던 유럽의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달콤한 꿈에 취했다.


회사에 복귀했을 때 나는 남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채 업무에 집중했고, 2개월이 더 지나서야 기혼자임을 밝힐 수 있었다. 팀장은 당황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 입장에서 이런 태도는 경험으로 얻은 기지였다. 다행히 몇 개월 간은 행복하게 일할 수 있었다. 업무 자체가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미술관에 비해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학예사로서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협력사와 틀어진 관계구축(?)을 위한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에 힘을 쏟았으나 나로서는 업무 내용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일을 할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무너진 자존심의 회복이 필요한 시기여서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그 직장에서의 기억들은 긍정적이다. 한 가지 불안한 점은 역시 오너의 태도였다. 면접 당시 나는 '계약직이지만 업무성과에 따라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다'라는 말을 70-80% 신뢰하였다. '정규직으로 일해도 잘리는 판국에 너무 안일한 생각아닌가?'라는 후회는 지금에 와서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을 것이 필요했다.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의 재계약 시즌에 나는 청천벽력같은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 회사는 정규직을 뽑을 생각이 없었고 뽑을 처지도 아니었다. 회사에 적응해가며 알게 모르게 생각해온 회사 실정의 어려움이 직접적인 영향으로 다가왔을때 비로소 실감되었다. 인생은 정말 새옹지마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의사와 상관없는 퇴직을 두 번째로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불안했다. 나는 일하면서도 계속 구인란을 살폈고 구직란에 내 이력서를 업로드하였다. 


언제부터 나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차악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의 내가 철없고 우습게만 느껴졌다. 경험해보지 않고 판단하는 정보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게됐고 나름의 신중한 선택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치열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차악책을 찾았다. 회사에서 내몰려 쫒겼을때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는 어둠을 경험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찾은 직장은 학예사에서는 완전이 벗어난 곳이었다. 그나마 좋았던 기억을 많이 간직한 대학시절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나는 동문사업에 발을 들였다. 물론 사업내용보다는 근로조건에 더욱 치중한 선택이었다. 자신감이 한풀 꺾인 나는 직위, 연봉, 직무보다는 근로형태, 연월차, 사업장의 위치 및 근로시간이 더 중요했다. 면접 시에 정규직으로서 정년이 보장됨을, 연월차 사용이 자유로움을, 근로자에게 불리한 계약으로 갈등을 야기시키는 회사가 아님을 약속받았다. 


스스로에게 타협하면서 삶이 안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당하는 사람들은 계속 당한다는 속설은 남일이었고 구두계약은 강제 효력이 없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채였다. 나름대로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면접 후 출근 일을 1개월 미뤄 업무 시작 전 충분히 회복기를 가졌고 유선 상으로 근로조건을 되물으며 이직하는 곳의 환경을 점검했다. 


출근을 3주 정도 앞둔 평일날, 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동문 자격으로 초대되었으니 와서 행사를 즐겨달라는 멘트였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으며 당시에는 뭐 도울 일이 있음 불러달라고 아량넓은 인사도 건네었다. 행사 당일, 충분히 시간여유를 두고 간 행사장에서 가자마자 급하게 현장에 투입되었다. 첫 박물관 면접 때 밤 10시까지 음식을 서빙하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내 새로운 시작을 비웃기라도 하듯 밤 10시가 넘어 끝난 고된 행사 이후, 임원은 포상회식을 제안했다.


출근 당일까지 마음을 다시 잡으며 새로운 시작을 스스로 응원했다. 업무가 어찌되었든 나는 더이상 잘리지 않아도 되었고 불리한 조건에서 노동법을 운운하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워크샵이 있는 날이었다. 금요일에 시작된 워크샵은 '우리의 일은 어떤 형태를 띄고있는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이어졌다. 질문했던 임원은 동문의 결속, 학교의 발전, 재학생의 장학기금 수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므로 서비스직 또는 봉사직의 형태를 띈다고 자문자답했다. 



다음 이야기의 결론에는 생각치도 않았던 반전이 있었다. 봉사직의 마음가짐을 바로하기 위해 근무조건을 변경한다가 요지였다.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나에게 뒤이어 들린 이야기는 점입가경이었다. 

"첫째, 근무시간을 연장한다. 둘째, 미사용 연월차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셋째, 추가근무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넷째, 기금모금을 위해 직원 당 할당된 동문 수만큼 대면요청의 미션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1달에 최소 3번 이상 50명 이상 참여의 행사를 진행한다."


부분적으로 이해가 가는 내용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해를 벗어났다. 애초에 면접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변화였기에 와닿지 않았다. 무기계약직으로 명기된 근로계약서에는 해당 내용들과 함께 임금조정은 임원의 판단에 따라 할 수 있다던지 근무태도, 불성실 및 능력부족 등의 사유로 임원이 직원에게 징벌을 부과할 수 있다던지 하는 조건들도 따라 붙었다. 워크샵은 노동조건 변경에 동의를 얻기 위한 '협의과정'이었고 내가 근로를 계속하면서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정당한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아니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일상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던 나의 노력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많은 고민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회사에서 합격소식을 전달했을 때 양가 부모님과 남편은 이제야 안정적인 직장을 들어갔다며 안심했고 슬슬 자녀계획에 대한 희망을 밝혔다. 나조차 기대에 부응하는 마음으로 금년도 하반기부터 자녀계획을 구체화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에게 또 다시 현실을 알려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주변의 걱정에서 벗어나서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하나?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이 아직 이러하다면 나도 이 상황에서 버텨야 하는 게 아닌가? 지금 버텨본다 한들 출산을 앞두고 벌어질 회사와의 갈등에서 나는 내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별 별일 있는 인생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드라마를 가지고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는데 그렇게 보자면 내 20대 청춘드라마는 아직까지 비극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모두의 공감을 살만한 문구들이 30대 초입에 들어서는 나에게는 버겁다. 이기적이고 경험부족한 청년이라 그런건지 오늘도 내일을 걱정하며 헤매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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