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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Hwang Aug 23. 2021

소설 스파숄트 어페어

1940년대의 옥스퍼드와 2010년대의 학생회관

민음사 블로그에 투고한 퀴어소설 <스파숄트 어페어> 리뷰.

https://blog.naver.com/minumworld/222477959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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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에어컨 바람을 쐬며, 방구석에서 600쪽이 넘는 장편 ‘게이’ 소설을 읽었다. 소설은 1940년대 영국 옥스퍼드의 한 기숙사에서 시작된다. 기숙사 맞은편에서 어른거리는 몸 좋고 잘생긴 남자와 그를 바라보는 3명의 게이(디나이얼이든 클로짓이든)로부터 말이다. 소설 속 ‘캠퍼스 게이 라이프’는 무척 낭만적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난 복학하기 전까진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우선 주인공들 비슷하게 문예 창작 동아리를 하긴 했지만-1940년대와는 다르게 문학 동아리는 (이른바) 인기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옥스퍼드에서 존 러스킨이라든지,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우아한 동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동아리방에서 글쓰기만큼이나 ‘포탈’, ‘데드스페이스’ 같은 비디오게임을 하루 종일 해 댔으니 로맨스를 즐기기에는 최악의 환경이기도 했다. 세계 대전 무렵만 해도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범죄였고, 한편 내가 학교에 다니던 2010년대엔 등화관제를 해야 하거나 무시무시한 사감이 돌아다니지 않았다.(이성 교제를 금지하는 중학교 교칙을 보면서 동성 교제는 괜찮은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은 있었지만). 20대 초반을 로맨스 없이 보냈던 일은, 대부분 촌스럽고 겁 많았던 나를 탓해야 할 일이다.


4월의 벚꽃 휘날리던 어느 날, 시나리오 수업의 교수님은 내가 쓴 시나리오의 두 남자 주인공이 서로 연인 관계이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 위에서 돌리던 펜을 떨어트렸다. 우정이라 생각했던 것이 다시 보니 너무나도 사랑이었던 까닭이다. 어쩌면 나보다도 먼저 교수님이 여름 방학에 다가올 내 운명을 눈치챘으리라. 그렇게 어느 여름 방학 즈음, 성북동 호프집에서 처음으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에서도 드디어 로맨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스파숄트 어페어』는 첫 부분만 보고서 20세기 초중반의 다소 오래된 ‘청춘 로맨스물’인가 했지만 대학 캠퍼스의 20대 청년들이 갑자기 40대가 되더니, 이야기는 급기야 70여 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서 오늘날에 이른다. 그동안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게 되었고, 나는 21세기의 한국, 어느 대학교의 학생회관 화장실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남자를 만났다. 데이팅앱으로 가까이 있는 게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무척 2010년대스러웠지만, 고작 학생회관 화장실에서 몰래 키스한다는 사실은 또 너무나 1940년대스럽다. 우리는 손 잡는 일도, 키스도 숨어서 했는데, 이건 1940년대의 옥스포드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후로 여러 남자들을 만나 보았지만, 학생회관 화장실은 그중에서도 좀 재미있는 장소였다. 서로 숨죽여 움직이는 것이 마치 공포 영화 주인공들 같았다. 키스를 나누다가도 작은 소리가 들리면 화들짝 놀라서 서로를 바라봤다. 화장실을 떠날 적에도 시간차를 두고 나갔는데, 상대가 먼저 손을 씻고 있으면 나는 다가가서 물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그는 생각보다 큰 나의 목소리에 역시 움찔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학생회관 바깥에 있는 자판기에서 조지아 캔 커피를 두 개 뽑아서 들고 나갔다. 남자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재미있는 걸 보여 주겠다며, 조심스레 게이 데이팅앱의 화면을 보여 주었다. 남극 대륙 한복판에 있는, 얼굴이 잘린 프로필 사진이었다.


“학교에서 어플 쓰면 불안해서요. 보통은 GPS를 이상한 곳으로 바꿔 놔요. 오늘은 남극으로 해 놨거든요. 근데 여기 보이시죠? 저 말고도 몇 명이 남극에 있어요”


화면을 보니 그 사람 주변에 몇 사람이 더 눈에 띄었다. 누구는 발 사진이었고, 누구는 가슴 사진이었다. 흡사 남극의 토막 살인 현장인 듯한 광경. 남극 세종 과학 기지로 게이들이 단체 관광을 간 것이 아니라면, 모두들 이 남자처럼 GPS를 조정해 두었으리라. 우린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훗날 술자리 게임에서 이색적인 키스 장소를 이야기 할 때면 난 대학교 학생회관 화장실을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사실은 이토록 별것 아닌 일화였다. 난 그렇게 남극의 토막 살인 현장을 서성이는 것만큼 시시한 20대를 보냈다.


친한 동생과 술 한잔을 하며, 간만에 이런 대학교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사장님이 잘생겼던 카페 이야기나, 학림 다방 뒷골목에서 당시 애인과 손잡고 걸어가다가 친구에게 들켜서 해명했던 일들.(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스파숄트 어페어』 속 스캔들만큼 떠들썩하지 않은 소소한 일화들.

술을 몇 잔 마시다가 동생이 장난스레 말했다.


“형, 형이 나 처음 만났을 때 나이보다, 지금 내가 한 살 더 많은 거 알아?”


그 말이 그냥 쓸데없이 기억에 남았다. 내가 지나온 세계와 동생이 지나갈 세계가 잠시 만났다. 동생은 결혼이 하고 싶다고 했다. 짝을 찾으면 대만에서 결혼식을 하면 어떨까, 한다고. 동생은 나보다 덜 시시한 20대를 지나는 중일지도. 나는 학생회관에서 남몰래 키스했던 20대 중반의 나와, 남극의 남자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건강하길!


20대의 나는 어떻게 30대가 되었나. 섹스와 사랑을 헛되이 쫓기만 하고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할 40대가 될까. 소울메이트를 만나서 결혼하는 50대가 될까. 20살 정도 어린 남자 친구를 데리고 다니는 뻔한 60대가 될지도. 『스파숄트 어페어』는 70여 년의 세월을 가로지르며 각기 다른 세대의 게이들이 저마다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다. 내 주위에 ‘지나갈 세계’에 대해 물어볼 사람들은 게이바의 멋진 사장님들 뿐이어서인지, 이 소설의 이야기들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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