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20대를 지나,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 32번째 생
무슨 말을 할 진 아는데
나서는 이는 하나도 없었네
밀려오는 멀미에 어지러워서
강가로 가 내 몸을 던졌네
내 몸이 떠오르면
꽃을 던져줘요
나는 그렇게 기억될래요
작년 여름 즈음 우연히 윤지영의 Blue bird를 들었다. 따뜻한 멜로디 뒤에 가사가 무거워서 적잖이 놀랐다. 강물에 떠오른 몸에 꽃을 던져달라니. 파랑새를 찾아다녔던 스무살 언저리, 고등학교 동창에겐 내 장례식에 Bon Iver를 기타로 쳐달라고 했다. 어쩐지 그 땐 새를 찾길 포기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쪽을 택했다.
죽음에서 자유를 찾던 어떤 시절을 지나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것은, 소설 금각사를 읽었을 당시다. 금각사는 군대에서 무척 좋아했던 중사님 덕분에 읽게 되었다. 요즘 같은 선선한 봄날, 사무실에 놀러가니 책 한 권을 빌려주셨는데 그게 바로 금각사였다. 정말 재미없어보이는 표지였던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읽어나갔다. 사실 군대에서 유일한 낙이랄게 책 읽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웬걸, 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읽기만 해도 재밌었다. 일기를 쓰던 수첩에 열심히 문장을 따라 쓰며 며칠동안 읽었다. 책을 워낙 안 읽기도 했지만, 이렇게 감탄하며 읽었던 소설이 또 뭐가 있었을까 싶었다. 책을 돌려드리며 감사의 말을 횡설수설 내뱉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좋았다는 둥, 좋은 책을 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둥.
“그래? 이거 게이들이 되게 좋아하는 소설인데”
장난기가 섞인 그 한 마디가 봄날 내 가슴을 흔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다지 티는 안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렴풋이 알고 계셨을 수도, 아니면 그냥 소설에 대해 전해들었던 이야기일 수도. 아직 벽장에 있었던 당시의 나는, 속으로 내가 게이가 맞긴 맞구나 싶었다.
금각사는 교토에 있는 금빛 사찰이라는데, 1950년 있었던 사찰의 방화 사건을 모티브로 작가가 소설을 썼다. 금각은 뭔가 절대적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다루어진다. 황금으로 된 사찰이라니 대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며 읽었던 기억이다. 전역하면 꼭 교토에 가서 직접 봐야지 하고 다짐했으나, 우연히 보게된(의식적으로 찾아보려 하지 않았는데!) 사진은 다소 초라한 모습이라 실망스러웠다. 불타기 전의 모습은 훨씬 아름다웠겠지..? 하는 내 욕망만 조심스레 흘려보냈다.
말더듬이에 못생겼던 주인공은 결국 금각을 불지른다. 사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아마 절대적 아름다움의 존재는 추함의 개념을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라는 임제의 말이 있으니까. 불구라는 속성으로서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겠지. 그 시절 군대에서 나는 금각과 함께 어떤 정상성과 경계선을 불태워버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재밌게도 전역을 하고 그 해 여름 처음으로 남자를 만났다. 스무살의 멀미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일전에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하다가 J가 델피니움에 얽힌 신화 속 슬픈 이야기를 알려줬다. 친구인 돌고래들을 위해 죽은 청년이 돌고래를 닮은 꽃이 되었다고 한다. 이 청년은 꽃으로 기억되었구나. 난 워낙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데, 내 눈이 반짝이는 걸 눈치 챘는지 얼마 전 델피니움을 섞은 꽃다발을 선물해주고 갔다. 딱 봐도 색이 화려하고 비싸보여서 난 보자마자 얼마를 줬냐고 다그쳤다. J는 화단에서 꺾어서 만들었으니 구청 공무원이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그랬다. 오늘 아침 일어나 화병에 물을 갈아주는데 홈팟 스피커에서 윤지영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 몸이 떠오르면~ 꽃을 던져줘요~ 나는 그렇게 기억될래요~’ 나는 갑자기 혼자 신나게 따라부르며 춤을 췄다. 꽃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20대를 지나,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 32번째 생일을 맞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