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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Hwang Mar 30. 2022

설악산 대청봉

남자와 등산 이야기

 난 나름 높은 산을 오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대학생때 동네 잘생긴 형을 따라 북한산을 올랐던 것이 그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난 워낙 어딜 돌아다니지 않아서 동네에 뭐가 있는지를 잘 몰랐다. 집 바로 앞에 있던 성북동 국시집이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당시 연애하던 형이 알려줘서야 알았다. 그러니 저기 보이는 저 산이 북한산인지 남한산인지 이름을 알 리도 만무했다. 아니 북한산은 북한에 있어야 하는거 아니야..? 동네 형이 갑자기 북한산 등산을 하자길래 난 어디 동네 뒷산쯤으로 생각하고는 가볍게 니트티에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 당시 형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중에 말하길 적잖이 어이가 없었다고.

 니트티에 청바지를 입고 북한산을 오르는 것은 진짜 끔찍했다. 땀은 나고 옷은 무겁고 청바지와 신발은 불편하고.. 평소에도 어차피 내려갈 산을 왜 올라가냐며 부산 백양산 등산도 거부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내 팔자에 북한산이라니. 미친듯이 돌을 밟고 올라가다가 중간에 국수 파는 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호기롭게 내가 국수를 산다고 했으나 나는 카드만 들고 있어서 형이 어이 없어하며 대신 샀다. 하긴 산 중턱 국수집이 카드를 받을리가.. 마지막엔 무슨 끈을 잡고 돌을 올라갔는데 진심으로 북한산을 등산하다 죽는 사람은 없는지 물어보고싶었다. 거대한 등산 협회가 매년 사망사고를 은폐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북한산 등산하다 죽는 사람은 뉴스에 나오지 못하는 걸까? 주위에서 등산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께 “그걸 입고 여길 왔어?!” 라는 말을 5번쯤 들은 뒤에 정상에 올랐다. 잘생긴 남자한테 홀려서 등산하다 죽을뻔한 과거의 기억이었다.

 2주 전 강남에서 양꼬치 무한리필을 먹고 J가 휴가에 설악산을 가자고 했을 때, 순간 그 북한산이 떠올랐다. 또 한 번 잘생긴 남자한테 홀려서 등산하다 죽을뻔 할 것인가? 등산 좋아하냐는 J의 질문에 예전에 북한산 백운대를 올라갔던 적이 있다고 했다. J는 북한산 정도면 꽤 험한 산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자신감을 얻어서는 지금 바로 속초 호텔을 예약하자고 했다. 아마 그 때까지 J는 내가 등산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등산화는 있냐길래 그냥 운동화 신고가면 안되냐고 했더니 순간 J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난 아차 싶어 쿠팡에서 최저가로 예뻐보이는 등산화를 골랐다. “예쁜거 말고 발목 높은걸로 사.. 눈 들어가면 힘들어..” 그 때 J는 처음으로 쎄함을 느꼈던 것 같다. 숙소는 설악산 바로 옆에 있는 켄싱턴 호텔로 정했다. 무슨 영화 샤이닝에 나오는 오버룩 호텔같은 느낌이었는데 처음엔 2021년에 이게 대체 무슨 인테리어인가 싶었는데 계속 보다보니 묘하게 끌려서 여기로 결정을.. 

 그렇게 2주동안 설악산을 간다는것을 잠시 잊고 지내다, 속초 출발 전날 J가 옷을 뭐 입고 갈꺼냐 물어보았다. 난 회사에서 받은 패딩 조끼와 바람막이와 파타고니아 재킷(왠지 등산하면 파타고니아를 입어야할 것 같은 느낌에)을 입을거라 말했다. J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

“등산복 없어..?” 아니 내 옷장에 그런게 있을리가.. J는 한숨 쉬며 자기가 등산장비를 두 벌씩 챙겨가겠다고 했다. 자기 옷이나 좀 챙겨 와달라고. 나중에 들었지만 옆에서 내 말을 들은 J의 부모님이 얘랑 등산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나는 며칠 후 있을 지옥을 꿈에도 모르고 속초 가서 할 보드게임을 트렁크 가득 담고 여행 준비를 마쳤다.


 우린 속초 켄싱턴 호텔에 짐을 풀고, 등산에 필요한 것들을 이마트에서 사오기로 했다. 난 힙색에 물 한 병과 하리보 젤리 몇 개를 가지고 갈 생각이었는데, J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며 진심이냐고 물었다. J는 스카치 사탕이며 트윅스며 거의 카트를 간식으로 가득 채웠는데, J는 조난을 대비해서 먹을 것과 물을 넉넉하게 들고가야 한다고 했다. 조난을 상정해야 하는 일이었다니. 아니 이걸 다 들고가면 오히려 더 조난당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그러면서 가루포카리스웨트를 사야한다고 계속 두리번 거렸다. J는 속초 가기 전날부터 가루 포카리 스웨트가 맛있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그걸 먹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아니 형 군대에서 가루 포카리도 안먹었단 말이야? 군대에서 뭐한거야?” 아직 군대도 안 갔다온 놈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도 웃기고 얘는 대체 어디서 뭘 들은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맛있다니 한 상자 챙겼다. 가루 포카리는 가루로 된 포카리 스웨트였는데, 물에 타 먹으면 포카리 스웨트맛이 난다고 한다. 나중에 얘가 군대 가면 택배로 가루포카리 한 상자 보내줘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J가 게토레이 한 캔과 몽쉘 몇 개를 지퍼백에 담아주면서 이걸 가방 가장 밑에 넣으라고 했다. 이건 조난 당했을 때 가장 마지막에 뜯어야 하는 비상식량이니 마지막까지 손대면 안된다고. 아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J는 무사히 하산한 뒤에 꺼내서 먹는 얼어있는 게토레이가 꿀맛이라고 웃으면서 덧붙였다.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웃는 그.. 제발 이 게토레이를 살아서 마실 수 있길..

 각자 1.5L짜리 물 한 병씩과 간식, 점심 샌드위치, J가 준 아이젠 등등을 넣다보니 이미 백팩이 꽉 찼다. 이건 무슨 행군용 군장인가 싶었지만 J는 텐트랑 코펠을 안들고 가니 너무 가볍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연유를 들고갈지 계속 고민을 했는데, 설악산 정상에 쌓인 눈에 뿌려 먹자고.. 디저트에 대한 J의 열정 잘 알겠고요(고민 끝에 연유는 들고가지 않기로). 마지막으로 등산복을 나에게 주었는데, 상의가 단 2벌이어서 놀랬다. J는 등산에는 패딩같은 열전도율이 너무 낮은 옷은 오히려 안좋다고 했다. 땀을 적당히 식혀주도록 공기가 잘 통하고 가벼운 옷이 좋다고. 내일 우리가 가는 코스는 정상까지 약 5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코스. 산은 해가 지면 위험하기 때문에 아침 6시에 출발해야하니 일찍 자기로 했다. 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잠들었다. 


 아침 5시 반쯤 알람이 울려 깼는데, J가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그냥 우리 등산 가지 말까..?” 그것이 내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난 호텔 조식이냐 지옥의 등산이냐를 심각하게 고민하다 어디선가부터 끓어오르는(아마도 북한산 등산 성공으로 인한)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인해 J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가자고 했다.

 겨울인지라 당연히 해가 뜨진 않았고, 준비한 후레쉬로 길을 비추며 산을 올라갔다.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J가 겁주려고 하길래 옆구리를 한 대 퍽 쳤다. J는 갑자기 극기훈련 해본 적 있냐 물었다. 대학생 신입MT때 비슷한 것을 했던 게 문득 기억났다. 남녀 한 쌍이 무슨 버려진 폐가에서 쪽지를 가져오는 말도 안되는 이벤트였다. 나랑 같은 조였던 동기 여자애는 폐가 앞에 다다르자 대성통곡을 했는데 나도 정말 울고싶었지만(없어져라 내 안의 가부장적 사고) 같이 손잡고(미안한데 혼자는 절대 못들어가) 폐가로 들어가 준비위원 애들의 놀래킴에 기겁하며 미션쪽지를 가져온 기억이 난다. 덜덜 떨며 돌아오면서도 저기 숨어들어가 있는 준비위원 애들이 더 대단하다 생각을..

 어쨌든 초반에는 이런 잡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해가 뜨고 돌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이라 산을 오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바람소리 물소리만 가득히.. 어느덧 천당 폭포라는게 보였다.

“형 이게 마지막 폭포래. 이제부터 등산난이도가 어려움으로 바껴”

천당 폭포 옆에 보이는 천국의 계단인지 뭔지 하늘로 솟아있는 등산로를 웃음기 사라진 채로 올랐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J가 가루포카리를 타서 주었다. 맛이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난 포카리스웨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기대를 했었던 것일까.. 천당폭포를 지나는 즈음부터 아이젠을 꼈던 것 같은데, 야무진 J가 내꺼랑 여분까지 챙겨서 빼도박도 못하고 눈길을 올랐다..^^ J의 아버지께서 비싼 등산용 작대기(?)를 빌려주셨는데, 서로 한짝씩 들고 바닥을 찍어눌러가며 올랐다.

 눈길은 진짜 끔찍했는데 아니 삐딱하면 정말 죽는거 아니야 싶은 길과 경사의 연속.. 나무위키에도 위험한 산이라고 하던데.. 역시 거대한 등산협회가 죽음을 은폐하는 것일까? 눈길엔 아주 미세하게 누가 올라간 흔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으면 이게 길인지 저승길인지 구분이 안 갔을 것이다. 눈이 오고 처음 이 길을 오른 익명의 누군가에게 살짝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5시간쯤 오르다 소청봉에 도착했다.. 난 소청봉 눈길에 퍼질러 앉아 여기서 그냥 내려갈까 100번쯤 고민했다. 내 눈빛을 읽은 J는 20대의 젊음이 무엇인지 나에게 역시 무언의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얘 눈이 참 맑구나.. 은은하게 돌아있는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커다란 돔 형태의 뭔가가 보였다. 그게 정상인줄 알았지만 나중에야 그게 중청 대피소라는 것을 알았다.

 소청봉에서 중청 대피소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을텐데도 체력도 바닥나고 무릎도 쑤셔서 꽤 오래 올랐다. 중청 대피소 전까지 다른 대피소가 두 번 있었는데, 전부 버려진 폐가같았던 데 비해 중청 대피소는 크기도 크고 뭔가 아늑했다. 대청봉은 근처에 있었지만 뭘 먹을만한 상태는 아니어서(바람이 미친듯이 불어서 휘청휘청 거렸다)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다 짜부러진, 샌드위치였던 어떤것을 얌얌쩝쩝.. 물론 이 때도 여기서 포기하고 내려갈까 100번쯤 고민했다.

 대청봉 오르는 길은 정말 짧았는데도 바람이 너무 세서 죽는줄 알았다. 정상에 있는 대청봉 돌맹이를 잡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바람에 날려 죽을까봐 난 차마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아서 찍었다. J는 20대의 젊음으로 서서 멋지게 사진을..ㅎㅎ 대청봉 정상에 올라 애플워치 운동 종료를 눌렀더니, 7시간이 걸렸고 3000칼로리가 소모됐다고 떴다. 활동 대사량으로만 따지면 1200칼로리쯤.. 회사 점심 한 끼를 그 정도 먹었던 적이 있었는데ㅎㅎ.. 생의 덧없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대청봉에서 내려오다 바람에 휘청여서 J아버지의 비싼 등산작대기도 부수었다. 사드리겠다 했지만 J가 한사코 거절을.. 구정에 고기라도 하나 보내드려야지..

 하산길도 정말이지 끔찍했는데, 무릎 연골이 무슨 망치로 때리는것처럼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길을 올라왔다고..? 하산길도 거의 비슷하게 여섯시간쯤 걸렸던 것 같다. 산길을 내려오는 와중에 해가 져버려서 후레쉬를 들고 내려왔는데, 그 땐 무서움보다는 죽으면 편하겠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산길의 하이라이트여야 했던 조난대비용 포카리 스웨트는 둘다 바보같이 존재를 까먹어버렸다. J의 말마따나 내려와서 반쯤 얼어있는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어야 했는데.. 그 맛이 궁금하지만서도 다시 올라갈 생각은 없다^^ 뭐 냉동실에 얼려먹으면 되지. 내려오며 이 끔찍한 하루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미화되겠지 싶어 꼭 이 고통을 글로 남기리라 다짐했다. 벌써 약간 아련해지기 시작해서 두렵다. 내 인생에 다신 없을 설악산 등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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