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4일차 - 27
숙소로 돌아왔을 땐 이미 녹초 상태였다. 더위가 해도 해도 너무했다. 그런 와중에 엄청난 걸음을 걸었으니 탈이 날 만 했다. 나는 저녁거리를 사 온 뒤 숙소에서 그걸 먹고 조금 쉰 다음 일기를 쓰겠다고 계획을 바꿨다.
그런데 쉬겠다는 마음이 다시 변덕을 부려 내 발걸음은 대릉원으로 향하고 말았다. 저녁 즈음이 되자 바뀐 하늘의 얼굴은 너무나 평안하고 고즈넉했기 때문이다. 그 하늘과 능선이 어떤 모양을 이루게 될지 너무 궁금했던 탓에 나는 남은 체력을 박박 긁어모아 쓰기로 했다. 어쩌면 내일 아침 일찍 떠나는 일정이라 마지막 날을 이렇게 마무리하기엔 아깝다는 무의식이 몸을 시켜 움직인 것일지도 모른다. 첫날과 마지막 날 모두 대릉원을 걸으며 마무리하는 이 적나라한 수미상관 구조. 행선지를 정하는 것은 오직 우주와 나만이 주조하는 일이다.
태양빛이 능선을 구르기도 했다가 나뭇가지 사이로 울먹이기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덤을 배경으로 키스하고 껴안는 연인들을 지나치면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잔디를 홀로 고요히 밟고 있는 고양이를 괜히 질투해 보면서, 나는 걸었다. 그러고 보니 첫날 버지니아 울프, 그러니까 나의 고모는 고양이가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고 지켜온 과정을 모두 지켜본 오래된 종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나는 얼른 그녀를 불러내, 저 고양이 어르신은 인간 아이가 등을 쓰다듬고 지나가는데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걸 보니 인자한 성품을 타고나신 분이 확실하다는 농담을 하고 싶었다. 첫날 나의 동행이었던 그녀가 해준 고양이 얘기를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마지막 날을 정리하고 있었다. 첫날의 동행을 마지막날 다시 불러내는 이 기묘한 수미상관 구조. 다시, 그 전부는 우주와 나만이 주조하는 일이다.
마지막이라는 실감이 들어 기분이 이상하다. 수미상관이라는 말의 ‘미’는 꼬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라는 글자를 보면 늘상 아름다운 미부터 떠올리곤 하지만, 이번에는 ‘미’가 꼬리 미이기도 하다는 것이 너무나 크게 와닿는다. 용의 꼬리가 될 바엔 닭의 머리가 되라고 하는 사람들을 지나 어른이 된 나는, 용 꼬리가 얼마나 아름다울 미인지 아세요, 중얼거릴 정도의 깜냥만을 키워놓은 채이다. 아, 이건 중요한 얘기가 아니고, 아무튼 나는 이 가출의 마지막도 아름다울 미일 수 있는지가 걱정스럽다는 말이다. 초록과 빨강이 활개를 치는 크리스마스보다는 연한 색감으로, 대릉과 노을이 서로 입을 맞추고 있다. 저 모습을 보면 이 마지막이 아름다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나 풍경 같은 걸로는 영 부족하다.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가출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 돌아다니는 길 내내 만든 가계도를 펼쳐서 내가 넣지 않은 사람이 혹은 고양이가 또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첫날을 불러내든 뭐든 해서 이 마지막을 최대한 길게 끌어야 한다. 그래야 내 영혼이 경주에 뒤늦게 도착하고 나서도 슬프지 않을 수 있으니까. 무슨 얘길 더 해볼까. 누구를 또 불러낼까.
이 가출은 성공인가? 사실 가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디로 돌아갈지가 뻔히 정해져 있는 4박 5일짜리 가출은 그냥 여행이고, 새 가계도를 찾아 나선 것이라는 명분은 나만 아는 것이며, 나는 다만 5일이 채 안 되어 다시 집으로 갈 뿐이다. 그래서 호주(戶主)가 되겠다는 내 호기로운 시작의 끝은 실패인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혼자’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낮에 동부사적지를 걸으며,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50대 여자들 다섯이 여행을 온 듯 보이는 무리를 지나치던 때에, 나는 분명 누구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또 계림을 빠져나오던 길에, 바로 옆에 다리가 있는데도 굳이 점프로 넘어가기를 시도하는 사람을 보고도 나는 분명 누구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라도, 나는 여행 내내 내 가계도에 넣을 사람들을 수소문하며 머릿속을 뒤지고 다녔다. 이 땅에 다녀간 혼들의 자취를 쫓아보겠다고 끝없이 서성였으며 끝내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그들에게 계속 말을 붙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 땅에 내 원래 가계도의 사람들을 겹쳐보기까지도 했다. 나는 혼자일 순 없다. 외롭고 충만한 나. 나. 나만을 목격하고 나만이 목격하는 외롭고 충만한 나. 나는 외롭고 충만하지만, 외로운 것이다. 나는 혼자일 순 없다.
가출 바로 전날 방에서 읽은 책이 문제였던 것일까?
패티와 로버트. 저스트 키즈. 현존하는 모든 것들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사랑을, 건너온 사람들. 나는 그들이 부러웠을까. 나는 혼자일 수가 없다.
사고나 자살로 죽는 예술가들의 70년대와 80년대, 그 시대의 목격자이자 동반자이자 생존자로서 두 사람은, 다른 애정이 생기더라도 서로를 중심에 두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시절’이어서 가능한 관계였다기보다도, 둘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였다. 그래서 그 시절을 지나오고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고 예기치 못한 끝 앞에서도 함께였다. 인생의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함께 건너가는 사람들을 목격한 적은 많지만, 그들이 함께 건넌다는 이유로 그때가 인생의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 된 사람들을 본 적은 드물다. 시절이 끝이 났음을 눈치채고, 부둥켜 살았던 서로를 보내주는 두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시절이 끝났을 뿐, 패티의 정규 1집 커버 사진은 말할 것도 없이 로버트의 몫인 것이다. 패티와 로버트. 저스트 키즈. 나는 가출을 하기 전부터 벌써 두 사람을 내 가계도에 넣어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자리를 내주었던 것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이사지왕을 사촌 자리에 넣을 때부터, 내 가계도는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아니, 옛 가계도로 새것을 설명하려니 내 것은 처음부터 망가져있었다. 물론 내가 그 종이에 쓰인 모든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사지왕의 이름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 모두가 내가 내 손으로 정한 나의 계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티와 로버트. 저스트 키즈. 이들에게는 조금 질투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길을 걷는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사진에 행인 451 정도로 조그맣게 끼여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린 그렇게 모두의 인생에 다녀간다, 최소한 엑스트라로라도 다녀간다, 그런 말들은 확실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를 발견해 줘, 발견해서 내 슬픔을 다 안아줘, 다 안아서 내 글자들을 흩뜨려줘, 흩뜨려서 나의 사진을 찍고 나의 노래를 만들어줘. 나는 산에 올라가 외치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모두 내게로만 되돌아온다. 메아리는 그런 것이니까. 나는 둘을 사랑한다. 둘의 사랑을. 그것은 내 하찮은 질투보다도 더 큰 사랑이다.
패티가 음악을, 로버트가 사진을 시작한 순간이 움틀 기미도 없이 원래 그렇게 가지를 뻗으려 계획했던 씨앗처럼 마구 자라 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의 예술을 조금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패티는 로버트의 사진을 부담스러워한 면이 있고, 로버트는 춤을 출 수 있는 노래를 만들라고 패티를 나무랐다. 하지만 패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앨범 사진을 맡길 사람으로 로버트를 골랐으며 그가 원하던 스타일의 노래를 결국 만들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히트곡이 되어있다. 나는 바로 그것이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 시절을 감싸고 있던 노래들과 각종 사건들과 각종 유명 인사들의 이름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만이 확실했다. 돌고 돌아 서로에게로 가는 진부한 이야기가 아닌, 각자의 방향으로 아무리 멀리 뻗어나간다 하더라도, 서로를 구해주고 알아본 공원과 보랏빛 목걸이가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사랑을 이어나가는 모습. 해가 지고 차가운 밤공기를 막아놓은 창문 앞에서, 나는 이 이야기가 눈물 나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인정했더랬다. 두 사람의 파란 별이 패티가 자신의 아이에게 선물한 노래에 담겼다는 게 눈물 나게 아름답다. 패티가 로버트에게 배우고 직접 만든 사랑의 조각이 후대에 물려줄 만한 유산이 되었다는 것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로버트가 마지막으로 찍어준 패티의 사진에는 패티의 ‘완벽한’ 아이가 함께라는 게 눈물 나게 아름답다. 두 사람이 서로의 시절이자 발상지이자 근원이며, 그것을 서로가 알고 있는 채라는 사실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Because the night. 밤은 사랑을 위한 시간이고, 둘은 그 검은 심연에 뛰어들어 내내 손을 잡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나는 그 밤과 심연과 사랑을, 지나가는 행인인 채 끌어안아 우는 사람이다. 어떻게 생긴 지조차 모르는 푸른 별을 안고 우는 사람이다. 오직 로버트가 평안하길, 그리고 패티가 평안하길, 사랑이 머무르길.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전히 메아리는 공명한다. 누군가와 들판에 누워 파란 별을 가리키고 이름을 지어준 다음 서로의 등이 마주 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걷고 싶다. 걸으면서도 가끔만 뒤돌아보고 절대 슬프지는 않은 그런 산책이었으면 싶다. 이제 제발 누가 나를 좀 발견해줬으면 싶다. 그러나 나는 혼자 걷는 여행자이며, 이 남루한 여행에 가출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라도 새 가계도가 필요한, 너무 절박해서 누구의 품에도 담길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혼자일 수 없다. 그런 혼자다.
그리고 두 글자.
레아.
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