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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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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29. 2024

편지

<가계도> 4일차 - 25

  할머니께. 

 딸을 낳았지만 아들도 낳아서 외할머니는 물론 그냥 할머니도 될 수 있는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일삼이에요. 저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외할머니를 할머니라 부르는 게 익숙하고 할머니를 굳이 친할머니라고 따로 부르면서 살았는데요. 우리 외할머니가 너희 할머니 잘 계시냐고 물어볼 때마다 저는 항상 처음엔 그게 장난인 줄 알아요. 왜냐하면 왜 자기 안부를 자기가 묻는지 모르겠으니까요.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할머니는 자기가 아니고요, 그건 그냥 외할머니인 그녀의 커다란 질투가 조금씩 삐져나온 형태랍니다. 내가 아무리 그녀를 할머니라고 불러도 그녀는 나의 할머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거든요. 한시도요. 

 할머니. 제가 할머니를 닮았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어요. 피하는 일 없이 불만을 터놓는 화법과 짜증 나고 속상한 일은 과장해서 표현하는 버릇, 그리고 고되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상시리 곧은 신념, 약속을 지킬 때까지 끝까지 믿지 않는 습관. 그 모두 할머니가 걸어오는 전화로 알게 된 것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게도 십여 년 정도는 있던 것들이더라고요. 

 할머니를 보고 배운 건 아닌 것 같아요. 확실해요. 왜냐하면 나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니까. 

 나는 외할머니가 먹이고 입히고 재운 아이니까. 나는 엄마의 시린 손목에서 뿜어져나오는 시큼한 냄새와 외할머니의 부엌에서 썩어간 외로움을 받아 먹고 자란 아이니까. 내 뼈와 살은 그것들로 빚어졌으니까. 그런데요. 아니, 그래서요. 그게 억울해요. 서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썩은내가 진동하는 고로 만들어진 내 몸의 원형은, 그러니까 내 피는 왜 당신을 닮은 건가요? 피는 못 속인다는 그 오래된 말이 왜 내가 사랑한 그 마당에서 피어나는 씨앗일 순 없는 건가요? 

 하지만 내가 그 마당을 기어코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는 죄목을 당신에게 뒤집어 씌울 수는 없겠죠. 왜냐하면 당신은 광산 김씨가 아니니까. 그저 광산 김씨 대를 잇게 해 줄 남자들을 낳았을 뿐인 거죠. 그 사람들 말이에요. 나와 엄마와 큰엄마와 사촌 언니가 차려놓은 제삿상 앞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잔뜩 폼을 잡고 서 있던 그 사람들.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검은색 어깨로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내 남동생은 들여보내주던 그 사람들. ‘왜’라는 물음에 ‘원래 그렇다’고 답한 그 사람들.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그 방 안에 있을 수 있었어요. 유일하게 남은 어른이라 그랬던 거겠죠. 명목은 중요하잖아요.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한 사람들에겐. 당신도 나와 사촌 언니처럼 어리고 엄마와 큰엄마처럼 젊었을 땐 문지방 너머가 자리였겠죠. 어머. 나도 내가 낳은 아들들이 각자 아들을 낳을 여자들을 데리고 온 다음에야 나와 성씨가 다른 사람들의 죽은 사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건가요? 소름 끼치네요. 나는 그 성엔 안 들어가고 말겠어요. 

 재밌는 사실 하나. 저는 큰엄마의 이름을 몰라요. 할머니는 아세요? 아. 예전에 한번 들었는데 까먹었다고요? 흠. 그렇군요. 저는 들은 적도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나 많은 식기를 같이 닦고 그렇게나 많은 전을 같이 부쳤는데도, 나는 큰엄마의 이름을 몰라요. 내가 큰엄마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알게 된 것도 스무 살이 넘어서예요. 큰아빠의 이름은 아는데도요. 큰엄마가 낳은 큰아빠의 자식들 이름은 아는데도요. 큰엄마의 이름을 몰라요. 큰엄마의 이름은 몰라요. 그건 그렇게나 많은 식기를 같이 닦고 그렇게나 많은 전을 같이 부치는 모든 일을 하는 중에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명절이 되어 내가 사랑하는 마당보다도 먼저 뛰어들어야 하는 그 공간에 가 있는 동안 내내 큰엄마의 이름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죠. 그녀는 큰아빠 다음으로 나이가 많아도 문지방 너머에 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내 어리고 어린 남동생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이 허락된 사람이니까. 어머. 나도  어느샌가 세월이 닿으면, 내가 낳은 아들들과 내 옆의 다른 여자가 낳은 아들이 문지방을 넘어 검은 옷을 입고 내가 차린 상 앞에서 절을 하는 뒤꽁무니를 쳐다보기만 하는 이름 없는 여자가 되는 건가요? 소름 끼치네요. 나는 그 성을 불태우고 말겠어요. 그래서 아주 재만 남기겠어요. 

 할머니! 사랑해요. 할머니가 전화로 해주는 이야기들이 슬플 때마다 당신을 사랑해요. 언젠가 할머니가 스스로가 얼마나 똑똑했는지를 말해준 적이 있어요. 국민학교를 다닐 때 상도 많이 받고 부상으로 딸린 필기구도 많이 받아서 필기구를 굳이 살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집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도록 허락해 준 것은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의 동생들이라는 이야기. 할머니는 여자였고, 돈을 벌러 나가야 했고, 똑똑했던 할머니가 번 돈은 학교를 다니는 동생들을 위해 쓰여야 했죠. 할머니는 6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어도 교육이 당신의 몫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원한을 아직 기억하죠. 할머니가 똑똑하기 때문이겠죠. 그럼 할머니의 동생들은 똑똑하지 않았는데도 학교에 다녀놓고 누가 무얼 희생하고 벌어다 준 돈으로 그럴 수 있었는지를 까먹었겠군요. 아빠는 60년 세월 묵히기만 해 온 그 원한을 풀 방법을 몰라서 지금 일삼이가 잘하는 것은 다 엄마를 닮아서 그렇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지요. 할머니는 그게 못내 뿌듯한 듯 했고요. 나는 그게 아파요. 슬퍼요. 똑똑한 할머니. 공장에 간 똑똑한 할머니. 할머니를 사랑해요. 그런데 할머니! 그 얘기가 끝난 뒤에 동생 밥 잘 챙겨주라는 말로 통화를 끝내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해볼 수도 있을 텐데요. 

 재밌는 사실 둘. 할머니, 저 사실 시집 갈 생각이 단 하나도 없어요. 할머니는 얼른 공부 마치고 시집가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지금 네 나이는 당신이 애를 셋 쯤은 낳았을 때라고. 그때마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리는 대신 웃기만 하잖아요. 혹시 눈치채셨어요? 저는 제 웃음이 가증스럽기만 하던데 눈치채지 못하셨어요, 혹시? 할머니. 저는 할머니가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 그런데요. 어쩌라고요. 네? 할머니가 애를 다섯을 낳았다는 게, 뭐, 어쩌라고요. 라고요. 저는요, 열한 살이었을 때, 식사 시간이 되어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우적우적 밥을 씹고 있었는데요, 아빠와 동생과 내가 그렇게 쩝쩝 소리만을 내며 반찬을 집고 있었는데요,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셋 모두 젓가락을 놓친 적이 있어요. 맛있다고 해라아아아아아악. 이렇게. 저는 그때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젓가락을 놓친게요? 아니요. 몰랐다는게요. 

 그 밥상이 누군가 몇 시간을 들여 끓인 국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식사 시간이 되면 그냥 당연히 존재하는 밥상인 줄 알았다는 게, 엄마가 부엌에서 홀로 분투한 결과물인 걸 끝의 끝까지 눈치도 채지 못했다는 게. 엄마가 차린 밥상을 엄마가 차렸다는 걸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게.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날 엄마의 그 울화통이 내 시작이었을지도 몰라요. 우리 엄마도 똑똑하거든요. 물론 엄마에게는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가지는 기회가 있었으니 할머니보다 조건이 더 좋은 시대를 만난 행운이 따른 거겠죠. 그런데 더 좋은 시대를 만난 운 좋은 여자가 왜 아직도 내가 차린 밥을 당연하게 처먹지만 말고 맛있다고 말하라고 소리를 질러야 했던 걸까요. 솔직히 말해보세요. 할머니도 있을 거잖아요. 내가 몇 시간 동안 흘린 땀방울이 거기 들어가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턱만 움직여 국을 삼키는 주둥이들을 보면서 기가 찬 적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적이, 특히 내 딸마저도 모른 척 그걸 처먹고만 있는 걸 보고 뺨을 갈기고 싶었던 적이, 지가 흘릴 땀방울의 미래를 채 알지도 못하고 아빠가 될 인간들 옆에서 지도 한 패인 줄 알고 있는 저 불쌍한 것의 목을 조르고 싶었던 적이. 나는 그날 엄마의 그 울화통을 들은 날부터, 내가 누구랑 닮은 건지 확실히 깨달았어요. 깨끗한 피부와 오른쪽 귀가 접혀있는 모양이 똑같은 생김의 문제도 그렇지만, 내가 김씨여도, 갓 태어난 내가 아빠의 이목구비를 찍어낸 듯 생겨 병원 사람들이 다 놀랐다는 일화가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아도, 내 인생은 엄마의 것과 닮게 된다는 것을요. 그리고 실제로 엄마와 나는 닮았어요. 엄마와 내가 마당의 장례식을 미리 상상하며 자신이 상주라고 못 박아놓는 엄마의 얘기들이, 우리가 세씨 족보에 얼마나 유감인지를 이야기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닮아있거든요. 우리가 닮은 거예요, 할머니. 엄마랑 내가 닮은 거라고요. 엄마요. 내 엄마요. 당신이 어쩌면 이름을 까먹었을지도 모르는 그 여자. 그 여자가 내 시작이고 나는 그 여자랑 닮은 거라고요. 


 죄송해요. 

할머니께 화풀이해봤자 내가 마당을 떠나기로 한 결정은 바뀌지 않는데도, 이렇게 화를 내버렸어요. 

그래봤자 당신은 박씨인데. 김씨 대를 이어주는 박씨인데. 

그래도 난 그런 가계도는 안 만들 거예요. 다른 집 가계도를 이어주지도 않을 거고요.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만 줄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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