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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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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30. 2024

여왕

<가계도> 4일차 - 26

  날씨 어플에서는 분명 오늘은 선선한 날이 될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세게 내리쬐는 태양 앞에서는 바람도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잠시 태양을 바라봤는데도 눈 앞에 검은색 사각형이 오래 머문다. 첨성대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래와 닮은, 내가 아는 어떤 마당을 생각해도 그것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가출의 피날레에 집중하라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첨성대를 바라봐도 그것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집중해야 한다. 검은색 사각형을 모른 척 걸어야 한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첨성대 주위를 굳이 한바퀴 돌아보며 그 면면을 들여다 봐야 한다. 


 첨성대 주위를 한 바퀴 돌 때는, 꼭 중간에 멈춘 다음 청성대의 뒷면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돌과 돌 사이에 풀이 끼여 자라고 있는 것을 두 뭉치 정도 바라봐야 한다. 저 풀들은 어쩌다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뒷면을 자신들이 평생 살 곳으로 선택한 건지, 그리고 대체 어느 시대부터 거기에 있었던 건지. 의미 없는 질문들을 나 역시 돌과 돌 사이에 끼워놓은 채로, 계속 걸어야 한다.


 나는 이제 ‘계림’을 향해 걷는다.

 계림은 김알지가 들어있었다는 금 궤짝이 발견된 신성한 숲이다. 첨성대를 뒤로 하고 3분 정도를 걸으면 바로 우거진 숲이 나온다. 거기엔 신라 건국 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지금은 기둥 끝부분만이 남아 있는 회화나무가 있다. 세 명이 와 껴안아도 다 안아질 것 같지 않은 크기다. 그 나무를 포함한 이곳 나무들 몇몇은 목발을 짚고 있다. 자기들끼리 뿌리가 엉켜 있기도 하다. 

 나는 목발을 짚은 나무들에게 ‘그녀’가 여길 다녀간 적이 있는지를 일일이 물었고, 노인의 경지를 넘어선 그 나무들은 인자한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나는 그 알쏭달쏭한 대답에 샘이 날 뻔했는데, 울창한 숲이 차마 채우지 못한 틈 사이로 저 멀리 첨성대가 보였다. 



 나는 그 장면이 왜인지 시간에 대한 은유 같다고 느끼며 …. ‘당신’도 이걸 보고 슬펐는지를 묻고 싶어진다. 어떤 시간은 당신을 가둬두었고 어떤 시간은 당신을 조급하게 했다. 양옆에서 당신을 향해 달려오는 시간들을, 피할 수 없어 맨손으로라도 막아보려 했을 당신의 마음을 감히 떠올려본다. 그리고 당신이 어느 날에는 분명 오른편을 슬쩍 쳐다본 뒤 뿌듯한 마음으로 나머지 길을 걸었을 거라고 한번 믿어본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갑작스레 분황사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첨성대가 있는 동부사적지를 따라 걸은 뒤, 동궁과 월지에 자연스레 닿은 다음, 그 일대를 산책하고 다시 대릉원 쪽으로 돌아와 카페에 앉아 글쓰기’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분황사. 분황사에 가야겠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곳들까지도. 당신의 유품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버스에 몸을 싣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첨성대를 보러 가기로 결심한 어제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박물관에서 ‘황룡사’ 책을 산 것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지도 어플을 잘못 봐 방향이 틀렸다는 걸 알고 황급히 내렸다가, 다시 길을 건넌 다음 알맞은 버스를 탄다. 날이 덥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당신의 ‘모란꽃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당 황제 이세민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꽃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그가 함께 보낸 씨앗이 꽃으로 자라면 향기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신이 단언한 이야기이다. 작은 글씨 하나에도 신중해야 하는 외교전에서, 이세민은 당신에게 명백한 조롱과 무시를 보냈다. 그는 훗날 전쟁 중 도움을 요청한 신라에게 여왕이 물러나고 자신의 종친을 국왕으로 삼는다면 군대를 보내주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신은 약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도, 그리고 여왕으로서도 늘 치욕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당신을 두고 “어찌 늙은 할미로 하여금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게 하였는가. 신라는 여자를 붙들어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왕이 ‘한낱’ 여자임을 비난할 수 있는 권력은 당신이 죽은 지 천삼백 년이 지나서도 살아남았다. 모란꽃 그림 일화를 두고 혼자 사는 여자 선덕이 제 발 저린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연구자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하고 만다. 

 향기 없는 모란꽃을 받고서, 당신은 분황사를 지었다. ‘향기 나는 왕’이라는 뜻이다. 그렇게라도 당신 자신의 존재감을 남기고자 했던 마음이 지금 여기 닿아 내 코를 간질인다. 

 나는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들어가 적막한 공간에 발을 들인다. 매표소의 직원도 내가 이곳에 온 게 의문인 듯한 눈치였다. 우리 사이엔 오간 말이 없었다. 담장이 지키는 분황사는 한눈에 전부가 들어오는 크기였고, 스님들의 말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올 뿐 관광객은 나 뿐이었다. 그 앞으로는 ‘법회중'이라는 초록색 간판이 보인다. 

 그 앞으로는 우물이 보인다. 언젠가 엄마가 선물한 책의 제목이 이것이었던 것 같다. 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고 했던 것 같다. 책의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나는 용이 진짜 있는지 살펴보려는 어린아이가 되어 최대한 목을 뻗어 우물 안을 훔쳐 보려 할 뿐이다. 일단,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주위를 조금 더 둘러보니, 어제 저녁 비가 내린 흔적이 이 땅에도 남아 있다. 모전석탑 앞으로 물웅덩이와 젖은 낙엽과 구름 조금이 함께 앉아있는 것이다. 고개를 위로 들어보면 얼굴이 부식된 지킴이가 지키는 모전석탑이 마침내 보인다. 그 앞에 기도를 올리면서 나는 당신 생각을 했다. 당신을 불렀다. 

 들리나요. 당신이 슬프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여기 살아있어요. 이세민도, 김부식도 모두 죽었지만 나는 살아있어요. 내가 여기 살아남아서, 기도를 하고 있어요. 내가 살아있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위안이 될까요. 나의 기도가 충분할까요. 살아있는 게 나인 것이, 충분할까요. 당신도 그들과 함께 역사에 묻혀 있는데 말이에요. 

 나는 얼굴이 부식된 지킴이에게 작은 메모를 남긴다. 말 하나만 좀 전해주실 수 있으세요? 딱 한마디면 돼요. 내가 여기 있다고, 내가 여기 왔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알겠죠? 

 우물에 사는 용에게도 메모를 남기려다가 그가 어련히 잘 전하겠지 싶어 마음을 놓고 분황사를 나온다. 


 아, 그리고 모전석탑은 지금은 3층이지만 처음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여왕의 이름값을 하려는 듯 아기자기한 탑을 지어놨다고 누군가 중얼거리기만 해도 나는 댁의 얼굴을 부수어 놓을 것이다. 아, 지킴이 씨. 그쪽한테 하는 말은 아니에요. 아직 거기 계셨네요? 



 분황사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황룡사지로 가는 길이 펼쳐져있다. 황룡사지가 그렇게나 가까이 있는 줄은 차마 몰랐던 나는 마치 깜짝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일단 분황사로 가야겠다는 결심만이 만들어져있는 채로 버스를 타서, 이 다음으로 당신의 무엇을 찾아가야 하는지는 아직 정하지 않은 참이었다. 그런데 분황사 안으로 걸어들어갈 때만해도 보이지 않았던 표지판이 이제는 보인다. ‘경주 황룡사지.’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걷는다. 조금은 들뜬 걸음으로 춤을 추듯 걷는다. 거기엔 당신이 만든 ‘황룡사지 9층 석탑’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꽤나 긴 길 내내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내 앞으로는 두 개의 하늘이 펼쳐져 있다. 하나는 해가 쨍하니 존재감을 과시하는 진짜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그 햇빛을 받고 감히 구름을 품은 물웅덩이다. 물에 모래가 섞여든 모양새라 구름의 색이 조금 탁하다. 상관 없이 내 발걸음은 경쾌하며, 나는 마스크를 벗어 풀내음을 맡아본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큰 까치가 내가 걷는 모래길 옆으로 나 있는 풀밭에서 큰 걸음을 걷고 있다. 날지 않고 굳이 풀이 닿는 감촉을 느끼려는 것이 그 향을 굳이 맡으려는 나의 수고와 닮았다. 

 황룡사탑 터까지 조금 남은 시점에는 저기 저 뒤로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마스크를 다시 쓰고 바로 앞을 보니, 땅에 박힌 바위에 앉아 스님과 노인이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뻔한 생각을 한다. 노인이 무언가 한탄을 하고 있겠거니. 스님은 그 노인의 번민과 고뇌를 받아주고 있겠거니. 

 그런데 그때, 스님이 눈물을 훔치는 게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면 이젠 그들의 말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스님의 눈물 섞인 한탄을 노인이 잠자코 듣고 있다. 잠자코 들으며 추임새를 넣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나는 그들의 옆을 모른 척 지나쳐 목탑지 앞에 다다른다. 

목탑지 옆으로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는 황룡사탑이 ‘군신들과 백성들의 열화 같은 호응’을 받아 건립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순간 맥이 탁 풀린다. 나는 내가 저기 저 뒤의 길을 걸어오는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는데 말이다. 태양과 구름에 반역한 물웅덩이와 그 옆의 풀내음에 마음을 뺏겨, 다리를 제외한 온몸이 빳빳하게 굳은 채였다는 걸 방금에야 알았는데 말이다. 당신이 이 주위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어제 읽은 책에서는 황룡사탑 건립이 반란의 명분이 되었다는 비판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어쩌면 당신의 실패. 

 그러나 내 긴장의 이유가 당신의 실패를 마주하기는 싫었던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것이 실패라는 말이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 땅, 너무나 직접적인 이 땅에도 적혀 있을까봐 싫었던 것이다. 그건 너무 잔인하니까. 그런데 군신들과 백성들의 열화 같은 호응을 받았다는 말이 적혀 있고, 나는 안심을 한다. 군신과 백성이 모두 환영한 탑 제작을 반란 세력이 핑계 삼은 거라면, 그건 그냥 반란 세력이 이상한 것이니까. 뭐가 됐든 어차피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안심을 한다. 

 당신의 치세에 반란이 있었다는 것이 당신이 위엄없는 왕이었다는 뜻이 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기로 한다. 당신에 대한 반란은 반란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가 왕이 되는 역사 그 자체가 이미 세상에 대한 반역이었으므로, 그것은 반란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더러운 반쪽 짜리 기계로 만들겠다는 치졸한 선언일 뿐이다. 흐려진 선을 다시 긋고 세상을 원상복귀 시키려는 유치하고 졸렬한 수. 그 수에도, 당신을 걸고 넘어지는 그 수에도, 당신은 당분간은 살았고, 살아남았고,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이것은 당신의 실패인가? 아니면 당신이 여자인 것이 오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 어떻게든 뭔가를 찾아보려는 역겨운 이들의 수작인가. 확언이 필요해 슬퍼지기 전에, 나는 내가 스님과 노인이 나눈 대화 역시 모르는다는 것을 떠올려본다. 나는 무슨 연유로 스님이 눈물을 훔쳤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목탑지에 쓰인 그 문장을 읽고 잠시 안도했다는 것만이 내가 아는 진실이다. 그게 다다. 그녀가 뭘 이룩했는지, 뭘 잃었는지 그런 계산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녀를,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 가계도에 적는다. 고조할머니 위를 무어라 부르는지 잠깐 검색을 해 본 다음, 종이에 ‘현조할머니’라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는다. 당신과 당신의 반역은 고작 물웅덩이에 비친 탁한 그것과는 다르다고도 적는다. 당신의 하늘은 환하고 내게 장엄하다. 


 한참 목탑지의 바위들을 보다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때 흰나비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급하게 뒤를 돌아보고, 나비는 황룡사탑이 있던 자리 뒤로 날아가 사라진다. 당신이 정말로 여기 이 땅에 들렀던 것일까? 

 왜 당신을 생각하면, 당신 가까이에 가면 항상 나비가 있는 걸까. 

 지난해 여름에 당신의 왕릉을 갔을 때도 나는 나비 한 마리를 만났어요. ‘봤다’가 아닌 ‘만났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 나비가 꼭 누군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죠. 무덤으로 가는 방향이 표시된 작은 표지판에서부터 팔랑이던 나비였어요. 나는 동행인에게 ‘여기 나비 있다’ 정도의 말을 하고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나비가 우리 앞으로 날아왔어요. 마치 앞장서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나비는 우리가 걸음을 멈추면 따라 쉬고, 다시 걸음을 걸으면 앞장섰거든요. 그렇게 능에 도착해 한참을 머물던 와중에도 나비는 우리 걸음을 따라 왔고, 다시 돌아나가는 길에도 앞장섰는데, 표지판 부근을 벗어나는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어요. 돌아봐도, 어디에도 없었어요. 나는 그 나비가 무어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비였을지, 그저 호기심이 동한 나비였을지, 아니면 천년을 잠들어있을 자리로 먼 산을 선택한 외로운 왕의 영혼이었을지, 그도 아니면 그 왕의 외로움을 감히 짐작해 몹시 슬퍼하던 내가 본 환상이었을지, 알 길이 없죠.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 나는 그 날도, 오늘도 나비를 봤어요. 스님과 노인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고 나는 그들을 지나쳐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걷죠. 

 또 올게요.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마지막 행선지로 당신이 잠들어있는 곳을 골랐다. 나비가 팔랑이던 그곳. 나 말고는 아무도 내리지 않는 도로의 정류장에서 내린 다음, 낮은 언덕을 넘고 논과 기러기를 지나쳐 산을 올라야 당신의 능이 나온다. 나무와 곤충들이 당신의 새로운 신하가 되어있다. 특히 나무는 호위무사처럼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빽빽이 지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소나무였다. 한결같은 마음의 상징. 능과 가까워질 때부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커졌다. 왕이시여. 저 자가 알현을 청하고 있나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더위에 숨이 찬 상태로 마침내 능을 마주한다. “용봉의 자태와 천일의 위의”는 여전한 것 같다고 홀로 중얼거려본다. 아무도 없는 동그란 공간에 나는 털썩 앉아보았다.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탑 터를 모두 돌아보고 난 뒤 그녀가 잠든 자리 앞에 앉아,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두려우셨을 걸 알아요. 고생 많으셨어요. 애쓰셨어요. 

 당신이 남긴 모든 게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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