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4일차 - 28
이 가출은 실패인가? 이것은 둥지로의 회귀인가? 아무래도 혼자인 건 무리라고 징징거리며 새 가계도를 안주머니에 슬쩍 넣은 다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이건 처음부터 여행이기만 했던 것처럼 멋쩍은 웃음으로 돌아오는 착륙인 것인가? 나는 아무것도 ‘의미 있게’ 만들지 못한 것인가?
가장 아끼지만, 숨이 막혀 다시 보기는 두려운 영화 하나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제목은 레이디 버드.
I wish I could live through something을 말하는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는 친구 줄리의 말대로 ‘넌 네가 주인공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관심종자’가 맞다. 레이디 버드는 통나무 배 타기를 고대하는 촌스럽고 사랑 넘치는 둘 중 하나지만, Give a number라며 짜증과 부채감과 사랑이 혼재한 관계가 버거워 그냥 놓아버리고 싶음을 폭로하는 아이이기도 하다. 모순덩어리의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는 둥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신의 주인공이 아닌 인생에 있는 하나의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실제로 품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한다. 뉴욕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새크라멘토와 집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멀리 날아갈 듯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돌아가버리고 만다. <버드>가 처음부터 철새를 의미했던 것 마냥. 드디어 새크라멘토를 벗어나서 뉴욕에 있는데도, 집을 벗어나서 자기만의 방으로 가질 수 있게 됐는데도, 레이디 버드는 ‘심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회귀해 있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이름을 엄마가 준 것으로 칭하며, 늘 지루해하기 바빴던 크리스천 문화-성가대-의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고향 이름을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샌프란시스코라고 답하며 쉽게 체념하고, 뉴욕의 하늘에서 브루스-전 애인과 찾은 별의 이름-를 찾는다.
‘넌 분명 새크라멘토를 사랑해.’ 그때부터 모든 게 예정되어 있던 걸까? 레이디 버드가 대학에 가기 전 방의 벽지를 흰색으로 도배하는 걸 봤을 때부터 난 어쩌면 그다음이 다 그려졌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이 시작됐다고 모든 걸 백지상태로 돌렸다가 자주 휘청이고 때로 울었던 날들이 계속됐던 것처럼, 나한테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나는 내가 0살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아서, 폐허인 것 같아서, 아무것도 키워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서러운 그 마음은 당연히 내가 있던 둥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마산을 사랑한 것도 맞고, 엄마 아빠를 사랑한 것도 맞지만 나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얗게 울면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 아빠가 준 내 이름을 내게 다시 붙이고, 세상에 새처럼 나서고 싶었던 과거는 묻어두고, 나를 크리스틴이라 소개하며 인사하는 일. 그것밖엔 없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엉망이다. 레이디 버드는 둥지를 다시 찾고, 그가 고개를 돌리다 갑작스레 화면은 암전 된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끝이 난다. ‘크리스틴’이 꾸역꾸역 버티다가 울다가 술 마시고 토하길 반복할 것이 뻔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영화는 거기서 끝이다. 레이디 버드는 이미 자신의 방을 흰색으로 덮어버렸다. 새 방을 그 전과 비슷한 스타일로 꾸며내 봤자다. 돌이킬 수가 없다. 최대한 벽에 써놓은 말들, 이름, 붙인 사진들을 흐릿하게라도 기억해 내야 하는데. 이미 자신의 이름을 레이디버드가 아닌 크리스틴이라 수정해 버렸다. 그런 굴절. 그런 굴레.
아 씨발! 그냥 술 마시다가 토하고 싶다. 방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 방이라 믿은 적 없는 기숙사에서 4년을 떠돌았으니 더 불행한 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다. 이 글도 엉망이다. 내 가출도 엉망이고 이것이 여행이어도 엉망이고, 내 새 가계도도 엉망인 것만 같다. 하지만 흰색 페인트를 바르고 싶진 않다. 더 엉망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는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갈망으로 자신에게 새라는 이름을 주었지만 (그랬을 것이다), 크레파스처럼 정렬되어 있는 갖가지 새의 특성들 중 엉뚱하게도 새가 둥지에서 산다는 것만이 주욱 뽑아져 앞으로의 직선 주로를 그리게 되었다. 그런 우스운 꼴이 지금의 나다. 영화가 울어서 아이메이크업이 번진 레이디 버드의 얼굴을 잠깐 비추는 것으로 끝이라는 게 잔인하다고 소리 지르고 이다음은 진짜 없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왜 나도 걸어본 주로를 복기하는 것으로 숨을 헐떡이게 만들어 놓고 다음을 내놓지 않느냐고 소리를 지르는 내 눈에서도 시커먼 액체가 쏟아져 나온다. 레이디 버드와 이 영화의 감독을 내 가계도에 집어넣는다. 나는 둘을 미워하며, 그것이 증오가 아니라 사랑임을 알아서 운다.
나는 이번에도 이룬 것 없이 집으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새라서, 날고 싶어도 결국은 다시 둥지로 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가출이 절실한 마음을 4박 5일의 여행이라고 둘러 대는 겁쟁이에, Give a number의 number를 감당하기조차 겁이 나서 눈을 감아버리는 겁쟁이에, 혼자 있을 줄도 모르면서 함부로 둥지를 떠났다가 둥지를 떠날 줄도 모르면서 혼자는 충만하다고 함부로 떠드는 겁쟁이. 갖고 태어난 것들을 땅에 버릴 수 없으면서 날아오를 거라고 외치는 기만자. 땅으로 추락한 다음 배로 기어 다니며 떨어뜨린 척했던 것을 전부 입 안으로 쓸어 넣는 위선자.
그리고 다시 두 글자.
레아.
너 동굴에 산다 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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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념을 멈춘다. 이 가출은 성공도 아니며 실패도 아니다. 경주에서 시작한 것부터가 이 모든 것은 그저 겁이고, 기만이고, 위선이다. 그리하여 내 삶이다.
나는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천마총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문득 어제 박물관 앞 정류장에 떨어뜨린 내 반지가 떠오른다. 그 반지 역시 언젠가 ‘유물’이 될 것이다. 내가 애써 다시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그 반지는 수많은 바퀴들에 떠밀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땅 속으로 고요히 침잠할 게 분명하다. 그러다 흙이 쌓이고 바람이 드러내는 여러 겹의 시간이 지나, 언젠가의 사람들에게는 마침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그 반지는 경주의 천년보다, 그리고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할 수 없었던 ‘혼자’를 해내며, 그렇게 영원을 살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천마총의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 금관에 대해서는 알고 있듯이, 언젠가 그 반지를 발견할 사람들은 나에 대한 것은 알아낸 적도 없이 까맣게 잊고 그 반지가 은인 척하는 구리라는 사실만을 떠들어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지가 만약 4067년 뒤 어느 박물관에 전시된다면, 나는 꼭 사족을 달고 싶다. 이것은 어느 여행자, 아주 외롭고 충만했던, 그러나 영일(盈溢 )에 대해서는 자주 되물었던, 우주와 그만이 주조하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어 봤던, 누군가를 꼭 찾고 싶던, 밤하늘을 보고 별을 찾아 울고 싶던, 방 벽을 하얗게 물들인 걸 후회한다고 조용히 방백을 읊조리던, 불 꺼진 고향을 빠져나올 때까지만 상상해 본 탓에 그다음의 매일을 헤매야 했던, 폐허인 땅에서 스스로 뿌리가 되겠다고 아둔한 외침을 심던, 그렇게 피어난 가계도를 흰색으로 칠해버리겠다는 급한 선택을 기어코 접던, 구겨버리고 싶은 종이를 안주머니 깊숙이 넣은 다음 다시 걷던, 그 여행자의 기억. 그 여행자의 겁과 기만과 위선. 그 여행자의 삶이자 찰나. 그런 것. 그 반지는 그런 것이라고.
대릉원을 빠져나오는 길에는 노인들이 황남대총 앞에서 셋과 셋으로 나뉘어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말들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무려’ 왕릉 앞에서 ‘고작’ 과일 가격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대릉만이 세월을 쌓아온 게 아니라는 듯 의연한 그 얼굴들을, 일몰 전 마지막 힘을 다하는 태양빛이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