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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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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Apr 02. 2024

<가계도> 5일차 - 29

 돌아온 집에서. 


 나는 책상에 앉아, 안주머니 깊숙한 데 넣어둔 종이를 꺼낸다. 구겨버리고 싶던 그 종이는 왼쪽 모서리 부분이 아주 살짝 접혀있을 뿐 멀쩡하다. 그 종이는 백지가 아니다. 내 이름을 가운데에 두고 위와 아래와 옆으로 다른 많은 이름들이 펼쳐져 있다. 그 모양은 땅속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것보다도 푸른 대지와 색 조합을 이루려는 듯 윗부분이 약간 튀어나와있는 뿌리를 닮았다. 

 현조할머니 덕만, 고조할머니 록산 게이, 고조 할머니 리베카 솔닛, 고조할머니 유디트 레이스터르, 고모 버지니아 울프, 사촌 이사지왕, 그리고 로버트와 패티, 레이디 버드와 그 감독. 몇몇을 제외하고는 백인 여자들이 가득한 그 가계도는 경주 땅에서보다도 더 엉망으로 보인다. 이름들이 엉킨 모양새 때문이 아니고, 내가 차지하는 면적이 너무 비대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보다는 내가 내 꿈의 레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다는 얘기다. 역시 모두 이웃사촌이 적당하고 내 집엔 나만 살아야겠지. 나는 종이를 서랍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찢거나 태울까도 생각했지만 여기밖에 적힐 데가 없다며 나를 찾아온 누군가가 생각나서 관뒀다. 이사지왕. 당신은 여전히 책 속에 있거나 땅 속에 있거나 영화 속에 있는 것이 확실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 눈 앞에서 순간 흐려졌다. 

 그리고 나는 그 흐려짐을 목격했고요. 나는 당신이 마지막 순간에 웃었는지 아닌지가 너무 궁금하고 애달파서 경주 땅을 벗어난 뒤에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어요. 내가 보게 될 건 버스 뒷자리에 앉은 타인의 눈 뿐인데도요. 나는 이 가계도를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흐린 모습으로 사라지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 서랍 안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그 안이라도, 계속될 수 있게. 나는 여기 당신과 한 모든 대화들을 남겨둘게요. 

 그때,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주인과 눈이 마주친다. 

 잠깐.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나는 지금 내 방 안인데. 여긴 더 이상 경주 불국사의 자그마한 박물관이 아닌데. 그 눈은 어찌 나를 잊을 수가 있냐고, 어찌 나를 두고 갈 수가 있었냐고 책망하는 눈이 아니다. 그냥, 내가 여기 있게 됐다고 말하는 눈이다.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은 어쩌고요? 나는 묻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종이를 서랍에 넣어둔다. 아, 그 전에.

 그에게 이름을 물어본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나는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주인이라는 길고 긴 말로 대신 여백을 채워넣는다. 

 나는 종이를 서랍에 넣어둔다. 그 안에 잉걸불이 타고 있다. 






*잉걸불: 활짝 피어 이글이글한 숯불.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이나 장작개비의 불덩어리를 말한다. 숯이나 나무가 불에 탈 때 가장 높은 온도를 유지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불잉걸을 ‘잉걸불’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잉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보다 훨씬 더 뜨거운 상태다. 뜨거움의 극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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