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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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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Apr 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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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5일차 - 30 (끝)

 우리, 한번 더 걸어볼까. 

 산책을 하자고요?

 네. 그때는 아주 작은 박물관에서가 다였지만.

 그래요. 좋아요.


( 3분 뒤.)


 날이 좀 춥네요.

 그러네요. 

 박물관 안은 따뜻했는데. 

 추위가 적응되지 않으시겠어요.

 괜찮아요. 박물관이 지어지기 전에는 이보다 추운 땅 속 계절도 겪어봤으니까요.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그러세요.

 땅 속에 있는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을 찾았을 때.

 네.

 기뻤어요?

 음, 네. 오래 헤맸거든요. 그걸 찾으려고.

 많이 아끼던 거여서요?

 아니요. 

 네?

 사실 살아서는 그리 아끼지 않았어요. 그런데 죽고나서 제가 그걸 찾아 헤매고 있었지요. 무엇 때문에 그게 필요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죽은 뒤로는 목마름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 

  아주 값비싼 물건이었다든가, 특별한 누군가가 선물했던 거라든가, 그 잔에 차를 마시면서 아주 행복했던 기억이라든가, 그런 거 없어요?

 네. 

 네?

 없어요. 없어요, 그런 거. 그냥, 그냥 찾아다닐 뿐이었어요. 

 …돌아가시고 나서 목마른 적이 없다는 건,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이 유리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그것들을 쓰지 못했다는 말씀이세요?

 설마요. 저는 계속 그것들을 쓰고 있었어요. 공기를 이루는 것들이 뭔지 아세요?

 갑자기요?

 아세요?

 질소, 산소, 아르곤, 이산화탄소…. 

 그게 뭐예요?

 아…. 아니에요. 공기를 이루는 것들이 뭔데요?

 마음이에요. 

 유치하네요.

 닥쳐요! 마음 맞아요. 이유나 기억 같은 게 아니에요. 그것들에는 향기가 없으니까. 마음만 이 땅 위를 둥둥 떠다니죠. 저는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이 유리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기다 마음을 실컷 부어 마셨어요. 

 그런데요?

 뭐가요?

 그런데 왜 미련이 남은 듯 박물관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던 거예요? 마음을 실컷 마셨는데도,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을 다시 찾아 오래 써 봤는데도, 왜 그 옆에 남아있던 거예요?

 아직 못 마신 마음이 있으니까요. 

 ….

 내가 잔에 따라놓고도 마시지 않고 남겨둔 마음이 그 잔에 아직 있으니까요. 며칠 햇빛을 받아서 바짝 말라 잔 안쪽에 붙어 있었는데, 그걸 사람들이 그대로 유리관 안에 넣어뒀거든요. 물만 조금 넣은 다음 대충 불리면 그 마음을 다시 삼킬 수 있었는데. 

 ….

 그것 말고도 이 세상에 숨겨둔 내 마음들이 얼마나 넘치는데요.  그걸 다 먹어치워야 거길 갈 수 있는데, 난 국화무늬 잔 없이 맨손으로 그걸 먹긴 싫어요. 

 ‘거기’라뇨?

 아직 몰라도 돼요, 당신은.

 ….

 이건 비밀. 

  …저도 미리 숟가락 같은 거라도 준비해둬야 하는 건가요?

 하하. 아뇨. 준비같은 것 없어도 알게 될 거예요. 그때가 닿으면. 아주, 아주아주 나중에. 숟가락이든 젓가락이든 잔이든. 그냥 알게 될 거예요. 

 네 ….

 마음은 많아요. 죽은 마음은 태어날 수가 없으니까 내가 당신과 한 대화는 쌓일 리가 없지만, 당신의 산 마음은 나와의 대화를 잔뜩 쌓아두겠죠. 지금 여기 이 길이나 아니면 우리가 두고 온 그 땅의 박물관에. 당신도 모르는 새에, 마음은 쌓여요.

 그렇군요.

 당신이 지금 알아야 할 건 하나에요. 마음은 많다는 것. 마음은 쌓인다는 것. 나중에, 아주아주아주 나중에,  찬찬히 씹어 먹고 소화할 시간들이 주어진다는 것. 

 세 가지 아니에요?

 그럼 다시 하나로 말할게요. 

 네.

 당신이 그리게 될 가계도는 아직 한참 많아요. 서랍에 넣어둔 것 말고도. 얇은 종이피들이 쌓여서 여든 개 정도의 서랍을 가득가득 채우게 될 거예요. 

  …그렇게나 많이요?

 네. 그렇게나 많이요. 그러니까 마지막이 엉망인 채 영화가 끝났다고 슬퍼하지 말라고요. 흰색을 걷어내는 건 생각보다 쉬울 지도 몰라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슬퍼했다는 걸?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길 왔어요?

 나를 계속 찾길래.

  ….

 나를 계속 부르길래. 

  ….

 이 말 해주려고 왔어요. 이제 갈게요. 


 그가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의 곁을 향해 다시 걸어간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걷는다. 뚜벅뚜벅. 나는 가끔만 뒤돌아보고 절대 슬프지 않다. 


 산책은 계속된다. 

 얼마 후, 주황빛 배를 가진, 손바닥만한 새가 길목으로 내려앉는다. 나는 너무 놀라 우뚝 멈추고 말았는데, 새가 무안한 표정을 감추고는 옆 담벼락 위로 가 앉았다. 내게 지나칠 시간을 벌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을 보고 건물숲을 보는 등 딴청을 피워준다.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공룡인 그 애는 친절하지. 

 잉걸불의 색을 몸에 휘감은 너. 네가 내 다음 가계도의 첫 이름이다. <끝.>
















글을 마치며.


 이 글은 제가 혼자 4박 5일 경주 여행을 하며 쓴 글입니다. 

 22살을 먹은 인생 처음 가 보는 혼자만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가출이라고 부릅니다. 4박 5일 짜리, 집으로 돌아올 것이 정해져있는 가출은 그냥 여행이지만 저에게는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온 길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참을 수 없었는지는 모릅니다. 3년 전부터 매일 밤을 뒤척이게 된 이후로 저는 하루하루 무언가와 늘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입니다. 저를 둘러싼 것들은 멀쩡합니다. 해가 잘 드는 집에서 깨어나는 하루들과 나의 뿌리가 되는 가계도는 더할 나위 없이 질서정연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새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완벽한 가계도 안의 사람들에게 여행을 좀 다녀와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새 것을 찾으러, 길지 않은 기간의, 집과 가까운 도시로의, 유치한 도망을 떠났습니다. 

 가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완성된 가계도에는 이런 이름들이 엉켜 있습니다. 

 덕만, 록산 게이, 리베카 솔닛, 유디트 레이스터르, 버지니아 울프, 이사지왕, 로버트와 패티, 레이디버드와 그 감독…

 그리고 이 이름들은 내가 앞으로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짓고 무너뜨릴 가계도의 단면일 뿐이라는 것을 함께 알았습니다. 


 그 뒤로도 여러 장의 가계도들이 만들어졌고 가장 최신의 가계도에는 이런 이름들이 있네요. 게일 루빈, 오드리 로드, 케이트 본스타인, 그리고 무엇보다 테레사 학경 차 Theresa Hak Kyung Cha 차학경 Cha hakkyung 수많은 이름들로 분절하는 그녀가 있습니다. 그러나 몇 장을 써내려가더라도

 도시에 대해 생각했다가, 내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생각했다가, 엄마를 생각했다가, 버지니아 울프에게 편지를 썼다가, 드라마 생각을 했다가, 박물관에 사는 영혼을 상상해 말을 붙여 보았다가, 그 모든 대화를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가, 다시 쓰고 싶은 순간들에 부질 없는 상상을 덧입혀 scene을 만들어 보았다가, 내가 지키고 싶던 자매에게 바칠 영화를 생각해 보았다가, 나만이 나를 목격하고 기록할 수 있다는 커다란 외로움을 전시장에 늘어놓을 어느 날을 상상해 보았다가…

 뒤죽박죽 꺼내놓은 이 이야기가 멀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내 서랍에는 여전히 잉걸불이 있고 내 모든 걸 먹어치울 그곳그날은 아직 멉니다. 저는 허름한 젊음을 사는 그러나 초라하지 않은 혼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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