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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에세이

너에게 몰래 쓰는 편지나 마찬가지야

by 박작가 Apr 01. 2025

2024년 작








 나는 윤호의 네이버 블로그 소개 글인 "그녀의 정적까지 사랑했네"에서 '그녀'를 맡고 있다. 누구를 떠올리며 썼는지 말해주진 않았지만 나를 지칭하는 건 확실하다. 아니라고 해도 “나 맞지?” 하고 우기면 그만이다. 어차피 이런 실랑이에서는 늘 내가 이기니까.



 3월의 어느 날, 나는 저렇게 시작하는 글을 윤호 블로그에 올렸다. 저 애의 노트북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네이버 아이디를 다 알고 있어서 내 노트북으로도 글쯤이야 언제든 써서 올릴 수 있다. 그래도 본인 노트북으로 몰래 글을 써서 올리는 건 또 다른 재미니까, 갑자기 그러고 싶어졌으니까, 맥북 에어 M2 키보드를 오랜만에 만지고 싶으니까. 또, 얘가 블로그를 잘 안 하는 걸 아는 만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때 발견해서 읽을지 궁금하기도 했거든.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해 봤다. 음... 마흔 될 때까지 안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전에 블로그 한 번 키워보겠다고 설치면 더 빨리 보겠지만 블로그 마지막 업데이트가 2020년인 걸 보면 한동안 그럴 것 같진 않다. 그런 마음이 든다 하더라도 티스토리나 쓰겠지. 난 네이버 블로그를 오래 해서 이게 제일 편한데, 넌 하여간 맨날 새로운 걸 찾는다니까.



 지금이야 안 그러지만 한때 윤호한테 나를 위한 글을 써달라고 조르곤 했다. 명색이 글쟁이라는 사람이 여자친구한테 헌정 글 하나 안 써준다는 게 말이 되나. 오만 이야기를 다 글로 쓰면서. 나한테 솔직한 마음 한 번만 담백하게 -하지만 자세하게- 써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였으면서도 가끔은 섭섭하다. 알았다고 고개는 끄덕였지만 이해 안 가기도 하고. 하여간 글이랑 조금만 관련되면 사람이 달라진다. 진지해지고 무거워지고 세상만사 어려워한다니까. 에세이나 일기 쓰는 것처럼 가볍고 짧게라도 좀 써달라고 했는데 자기는 그렇게는 못 쓴단다. 그런 너를 참 사랑하고 그런 면을 이해하지만, 아니 글쎄, 그래도 좀 안 되겠니? 안 되는 거 알아. 알겠어. 그래도!



 나는 글로 마음을 표현하는 데 능한 사람이다. 언제나 일기를 썼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쓰다 보면 무거운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손가락 끝에 힘이 실리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난 언제나 글이었다. 늘 글로 생각을 정리했지. 묵은 감정을 글로 털어버리며 기분을 추슬렀고 가끔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거나 새삼 네가 고마울 때도 역시 글을 썼다. 딱 그날이 딱 그랬나 봐, 갑자기 너를 쓰고 싶어졌던 걸 보면.



 10년이 넘은 내 블로그를 뒤져보면 네 이름이 가득하다. 남자친구, 남친, 애인, 축축이, 윤호, 뭐 심하게는 등신에 멍청이도 있고 -사실 우리 사이에선 별로 심한 게 아니지만-. 나는 빛바랜 것까지 합해서 서른 개도 넘는 너의 별명을 지어줬다. 일일이 떠올릴 수는 없겠지만 아마 그 정도 숫자쯤은 가볍게 넘는다는 걸 너는 바로 알 수 있을 테지. 나는 그렇게 다양한 이름을 가진 너를 부르며 너와 처음으로 사적인 연락을 했을 때, 네게 고백을 받았을 때,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 네가 미울 때랑 고마울 때, 또 너무 사랑스러울 때 글을 썼다. 어떨 때는 침대에서 떨어트리고 싶고 어떨 때는 끌어안고 싶은 너. 상처 주고 싶으면서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너. 그리고 끊임없이 마음을 확인하며 시험해 보고 싶으면서도 내가 없으면 정말 죽을 거라는 너의 말을 믿는 나. 고등학생 때 바랐던 외국인 남자친구는 평생 사귀지 못하겠구나 하고 아쉬워하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지 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나. 그리고 그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이나 보는…… 너(참고로 윤호는 휴대폰 중독자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이런 식으로 마음을 보여주면 윤호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하던 것처럼 다른 곳에 먼저 쓰고 링크를 전해 줄 수도 있겠지만 글쎄, 마음을 꼭 알아 달라며 눈앞으로 들이미는 건 영 멋지지 않단 말이지. 그래서 언제 발견할지 모르는 네 블로그에 숨겨두었다. 그러면 난 기쁨을 혼자서 오래 만끽하다가 나중에 네가 발견해서 읽었을 때 사랑이라는 다른 형태로 돌려받을 수 있을 테지. 아마 넌 내게 언제 썼냐고 먼저 물어보고 -쓴 날짜가 뻔히 있는데 아마 그건 안 읽겠지-, 왜 말 안 했냐고 앙탈을 좀 부린 다음 -그럼 나는 "그냥"이라고 답할 거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한두 마디 할 거다. 안 봐도 유튜브다-요즘은 비디오 아니라며?-.



 그렇지만, 내게 돌아오는 사랑의 에세이는 없겠지. 너는 이런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너의 숨겨둔 글을 보고 놀랐어, 나도 너를 사랑해,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꼬시고 싶었고 너는 너무 예뻤어. 너의 비듬부터 방귀까지 다 사랑해.”라는 말은 들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모르는 마음까지 실토하는 너의 글을, 어쩌면 나는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할 것이다. 글은 슬플 때만 쓸 수 있다고 수년 전부터 말해왔던 너니까, 우리는 너무 가까워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고 말했던 너니까.



 하지만 다행이다. 내가 주관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서. 우리 둘 중 한 명이라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얼마나 다행이야. 우리가 지나온 지금까지의 시간이 글로도 남아있잖아. 사진은 지난 우리 모습을 보여주지만 생각까지 보여주지는 못한다. 카페에서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난 뒤 내가 너를 미워했던 거, 너의 메시지 답장이 귀엽다고 캡처하기 직전 너와 헤어질 생각을 했던 거, 그런 우리의 보다 가깝고 진한 이야기를.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사소한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나는 그런 게 참 소중하다. 사귄 지 100일이 되었을 때 난 너를 엄청나게 미워했고 1년이 지났을 땐 널 너무 사랑한다고 했다가 2년이 지났을 땐 언제 헤어질까 걱정했다. 그러다가 웃기지, 3년이 되었을 땐 5년 뒤에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 5년이 되었을 땐 네가 지겨워진 것 같다고 말했었잖아. 그렇게 지난 세월 속에서 너를 미워하고 싫어했을 때가 분명 있었다. 그래도 눈 뭉치 굴리다 눈사람 되는 것처럼, 그 작은 눈 뭉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중엔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지난 미움을 모두 끌어안고 지금 난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와 나는 알잖아, 지금은 희미하더라도 그 작은 눈덩이가 품고 있는 순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그런 소중한 순간 몇 개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싶다. 저절로 떠오르진 않아도 어떤 글을 읽은 뒤 "맞아. 나 그때, 분명 싸우고 화나서 집 나갔는데 네가 붙잡았잖아."라고 되새기고 싶다. 그러고는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떠올리며 대화를 나누고, 몽글몽글하고 시큰해지는 마음을 안은 채 너도 함께 껴안고 싶다.



 우리는 늘 그랬잖아. 나는 글을 보며 예전 이야기를 꺼냈고 그러면 너는 생각났다며 그때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했어. 그러고는 우린 지금 진하게 사랑하고 있는 현재를 마주한 채 서로를 더 소중하게 여기겠노라 말하곤 했지. 물론 그러지 않아도 넌 늘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말하겠지만, 그래도 공기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랑이 모여서 터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잖아. 콜라에 있는 탄산이 폭발하는 것만큼의 임펙트가 있다고.



 난 네가 참 좋아. 네가 얼마나 자상하고 착하고 잘해주는지를 줄줄 쓰지 않았음에도, 사랑하는 마음을 온갖 수식어로 휘황찬란하게 묘사하지 않았음에도, 너는 내 사랑을 충분히 이해할 거라는 걸 아니까. 너는 사랑을 말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이 글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마음이 커야 할 수 있었을지 훤히 꿰뚫고 있을 거야. 너는 글을 잘 보는 눈을 가졌고 끝내주는 문장과 아닌 문장을 구별할 수 있으니까. 음, 그래도 말이다. 이 글은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비문이 있을 거고 늘 그랬듯이 과한 표현도 제법 보이겠지. 평소의 윤호라면 아마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서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생각의 흐름대로 써야만 표현할 수 있는 마음도 있기에. 이 글의 부족한 부분을 사랑이 메꿔주고 있으리라 믿는다. 아무리 담백하고 깔끔한 글을 좋아하는 너라고 해도 이 글이 완벽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걸. 그 사랑을 누구보다도 잘 알잖아.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 너한테는 일일이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점이 참 많거든. 그렇지만 가끔은 널 미친 듯이 괴롭히고 싶어. 네 마음을 지독하게 시험하고 싶고, 누구의 마음이 더 큰지 굳이 비교하고 싶어. 일부러 못된 말을 꺼내서 상처를 주고 싶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위해 네 잘못을 몇 번이고 되새기고는 숱한 사과를 받고 싶어. 아마 난 평생 이러겠지. 넌 오십 살이 되어서도 나를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을 거고, 길거리에서 "우리 이러니까 사귀는 것 같아"라고 외치는 내 목소리를 듣게 될 거야 -그땐 결혼한 것 같아, 가 되려나?-. 그래도 날 사랑해 줘, 예쁘게 여겨주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하는 말이잖아. 나도 다 알거든. 너 역시 괜한 억지를 부리는 나를, 차마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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