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동안에
2024년 작
"진심으로 예수를 받아들였어?" 내가 물었다.
"으응, 그런 것 같아." 엄마가 말했다.
-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232쪽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시 죽음을 다루는 책은 만족도나 내용을 떠나 사람의 마음을 건든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기에 그러리라. 한 번 쯤은 경험해봤거나 머지 않아 나를 찾아올, 그게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주워 들었을 누군가의 죽음.
<H마트에서 울다>의 작가는... 엄마가 평생 종교를 믿지 않았다고 했다. 저 대화를 나누기 약 두 해 전 죽은 엄마 동생이 유언으로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음에도, 미국 한인 커뮤니티가 종교를 주축으로 형성되어 있음에도. 그랬던 엄마는 암에 걸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갑자기 찬양을 드리며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작가는 첫 예배 직후 저렇게 물었고, 대답은 저러했다. 하지만 정말일까? 정말 예수님을 받아들였을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해서 모르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마당에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설사 알게 되더라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또 다른 일이다. 눈에 보이는 행동도 이해가 안 돼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온갖 미사여구를 잔뜩 묻히고 길게 늘어뜨려야 겨우 핵심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우리네 마음. 확신하건데, 그 전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말이지. 그래도 계속 질문하고 이야기하며 더 알아가려고 노력할 순 있다. ‘솔직하게 말해줘, 정말 예수님을 받아들인 거야?’,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어? 진짜 저 위에, 그러니까 엄마 머리 위에 신이 있다고 믿는 거지?’ 그러고는 무수한 질문을 던지고 받은 무수한 답을 모아 결론을 내리는 거다. ‘엄마가 죽음을 앞에 두고 신한테 의지하고 싶어졌나봐’, ‘엄마가 믿기 위해서 노력하기로 했나봐’ 하고. 질문을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때나 가능하다. "너희 엄마가 잘 때 예수님을 만나 얘기 나눴다고 했어. 알지? 잘 때 오만 꿈 다 꾸는 양반인거.” 라는, 상상하기 어렵고 평범치 않은 게 정답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거다. 더 알고 싶고,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그런 마음으로, 나도 주변 사람에게 질문을 많이 던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나는 떠올릴 수 있다. 낯선 식당에 들어갔을 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불평했다가 이내 멋쩍게 웃으며 아니라고 수습하는 엄마를,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내게 조언을 건네고 위로해주는 윤호를, 어버이날이나 2월이 되면 어김없이 울리는 우리 집 사남매 단톡방을. 이는 내가 주변 사람과 계속 대화했기에, 서로 질문을 하고 답을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건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고.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때 자문자답하면 나를 더 알 수 있을 거다. 그걸 꼼꼼하게 기록해서 주변 사람에게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라는 사람의 실체가 더 명확해질 테니까. 사람들이 훗날 사라진 나를 떠올렸을 때 더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을 테니까.
-너는 왜 새벽 3시가 되도록 잠을 자지 않는 거야?
-자기 전까지 전자기기를 많이 만져서 그렇거나, 아니면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런 거겠지.
-전자기기는 왜 만졌고 또 마음은 왜 어지러운데?
-조금이라도 안 만지면 심심해. 난 전자기기 중독자거든. 알잖아, 스마트폰을 조금도 손에서 못 떼는 거. 그리고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할 때면 도통 진정이 안 되네. 나는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날이 많아. 그럴 때면 일기를 썼고, 가끔은 괴로운 마음에 수면제를 복용하기도 했지. 엄마는 이걸 몰라. 남자친구만 알지. 의사는 반 알만 먹으라고 했는데 어느 날 나는 그 말을 까먹고 한 알을 먹었고 그걸 윤호한테 말했어. 윤호는 수면제가 좋지 않다고 걱정을 쏟아붓고는 의사 말대로 꼭 반 알 씩만 먹으라고 당부했어. 정작 그러고는 내가 언제 수면제를 먹었는지, 먹기는 했는지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어쩌면 내가 수면제를 처방받았다는 걸 잊었을지도 모르겠어. 그나저나 그런 마음으로 일기를 쓰면 어떨 때는 끝내주게 솔직하고 잘 쓴 글이 나오지만 어떨 때는 그냥 똥글밖에 안 나오더라. 그건 다 쓰기 전까지는 몰라. 그리고 높은 확률로, 괜찮은 글을 쓴 날이면 그 글에 푹 빠져서 똥글을 쓸 때보다 더 늦게 자게 되더라고. 웃기지 않아? 아, 물론 잘 썼든 못 썼든 글은 모두 블로그에 남아있어. 내 블로그 주소는 말이지....
그러면 이제, 이 대화를 읽었거나 직접 나누어 본, 가끔 나를 그리워 하기도 할 사람은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런 밤에 영주는 어떤 글을 썼을까? 만약 진지하게 글을 썼다면 뭘 주제로 썼을까? 하고. 이렇게 구체적인 상상은 외로움과 그리움을 덜어주면서도 기분 좋게 나를 떠올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나는 이런 걸 원한다. 내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좋아했고 아껴줬던 사람이 최대한 구체적이면서도 슬프지 않은 방향으로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역시 그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많은 대답을 들려주고, 그보다 더 많은 글을 남겨야겠지.
지금이야 안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나는 상상 속 단두대에서 엄마를 많이도 죽였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 중 누가 가장 빨리 세상을 떠날까, 하고 생각한다면 역시 부모님이니까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또래인 자매, 형제들이나 남자친구가 곧 죽을 거라고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엄마가 죽고 난 다음 나와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떤 부분은 너무나 선명한데 어떤 부분은 안경에 물이라도 묻은 것 마냥 흐릿하다. 그러면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얼굴을 찌푸리곤 내게 질문하는 거다. 나는 엄마를 얼마나 잘 알고 있고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질문을 했을까? 하고. 나는 엄마가 하루에 몇 시간씩 일을 하는지, 내가 엄마 휴대폰에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엄마에게 하나님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지만 엄마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어릴 때 어떤 행동을 했고 그걸 본 엄마의 생각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빠도 그렇다. 8년 전 나와 동생에게 그렇게 소리칠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후회하고 어떤 마음으로 생일에 말을 걸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중에 이 질문을 떠올려보면, 그리고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아마 마음이 공허하고 텅빈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영원히 알 수 없으니까, 나로서는 뭐 하나 추측할 수 없으니까. 아마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평생 모를 거다.
그러니까 질문을 해야겠다. 하나라도 더 알 수 있도록, 내가 관심있다는 걸 알릴 수 있도록, 그리고 더 생생하게 우리를 그리기 위해서. 대상이 내가 되든 네가 되든 저기 테이블 너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이든, 누구든 좋다. 의미있는 걸 하나라도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뭐, 사실 그 어떤 질문이 쓸모 없겠어. 상대를 더 알고 싶어서 하는 거든, 입 다물고 있기에 어색해서 하는 거든.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남기고 싶었던 건 오직 글 하나 뿐이었는데 이제 하나 더 늘었다. 세상을 떠나고 없을 때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굉장히 구체적이고 진짜 같은 상상. 그걸 위해서 사는 동안 흔적을 하나라도 더 남겨야겠다. 최대한 자세하고 다양한 질문과 답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