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윤 May 07. 2024

책 :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

2024. 5. 7.

공개적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서 정체성을 찾는다면 뭔가 빠진 게 있는 것 같고 뭔가 정체성의 핵심이 약해지고, 뭔가 존엄성이나 내면성을 잃는 것 같다. 이제 '보이지 않기'와 '숨기'가 똑같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삶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끊임없이 노출에 대한 어떤 해독제를 찾아내고, 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이지 않고, 들키지 않거나 눈에 띄지 않는 게 얼마나 값진지 다시 생각할 때다. 보이지 않게 되는 걸 그저 도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와 힘이 되는 조건으로 여길 수 있을까? 보이지 않게 되는 건 품위와 자기 확신의 표시가 될 수도 있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충동은 자기만족적인 고립이나 무의미한 순응이 아니라 정체성, 개성, 자율성, 목소리 지키기와 관련이 있다. 그저 디지털 세상에서 뒷걸음치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삶에서 진정한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사라지는 건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서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수치스럽거나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사회, 문화 혹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이고, 우리 존재감에 꼭 필요할 수 있다. 인간은 내면적이고, 개인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노력을 할 수 있다. 깊은 침묵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받기보다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23~4쪽)


이 책은 은둔에 대한 책이 아니다. 소심하거나 소극적인 사람을 위한 책도 아니다. 도리어 끊임없는 노출과 연결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반대편의 세계가 도처에 널려 있음을 소개하는 책이다. 숲이 될 수도 있고, 바닷속이 될 수도 있고, 대도시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 우주 속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숨기, 사라지기, 작아지기가 현대인의 삶에 얼마나 유용한지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증명한다. 그를 위해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책을 읽는다. 뿐만 아니라 사라지는 현상을 연구하는 여러 곳을 여행한다.

투명인간이 되거나, 투명망토를 쓰지 않고, 기게스의 반지를 끼지 않아도 우리는 사라질 수 있다. 그 사라짐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다양한 언어로 유혹한다. 결론 부분에 감동적인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감한다.


존재감이 줄어들면서 내 정신이 리듬을 맞춘다는 사실을 안다. 존재감이 줄어드는 건 개인과 집단 사이의 그저 작은 충돌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 삶의 정말 많은 부분을 쏟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자기애의 욕구 때문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하고, 확실한 정체성을 가져야 충만하고 너그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최대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다"나 "너를 본다"나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그저 삶을 가장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헌신하는 대의, 우리의 아이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다.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할 때 우리 자신이 작아진다고 느낄 때가 너무 많아 놀랍다. 작은 물방울 같은 각자가 모여서 세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연대감을 가장 강하게 느낀다. 우리가 작아지고, 우리 존재감이 줄어들수록 우리의 연대감, 인간성은 커진다. 우리 자리를 찾으려면 먼저 그 자리를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우리에게는 이렇게 드러나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하는 환경을 헤쳐 나가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다.

사라지는 법을 이해하는 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일의 일부라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해진다.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충만하게 지금을 살아가는 법과 사라지는 법 모두를 아느냐에 좌우된다. 그래서 나는 때에 따라 보이지 않게 되는 걸 옹호하게 되었다."(331~332쪽)


<추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노자를 떠올린다. 우주(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노자와 자꾸 겹친다.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작은지, 그렇지만 그 작은 것이 얼마나 좋은지. 한 없이 작아져도 괜찮겠다는 위안을 노자를 통해, 이 책을 통해 얻는다. 지워지고, 사라짐에 대해 명상하자.

이전 15화 책 :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