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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y 14. 2024

책 : 눈물꽃 소년

2024. 5. 14.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깊은 물음이 울려올 때면 나는 내 안의 소년을 만난다. 간절한 마음과 강인한 의지가 살아있던 눈물꽃 소년으로  돌아가 다시 힘을 길어 올린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의 유산은 결여와 상처, 고독과 눈물, 정적과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 빛나는 것은 밤하늘 별빛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사유가, 간절한 마음과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깊은 어둠에 잠겨 살아온 내 마음에는 어둠이 없었다. 어둠이 잉태한 그 무엇이 비밀히 자라고 있었고 어둠 속에 길을 찾는 내 눈동자는 빛이 되었다.

이제야 나는 내가 받은 위대한 선물이 무엇인지를 실감한다. 결여와 정적과 어둠이 하나의 축복이었음을.

언뜻 낙후되고 고난으로 보이는 그것들이 어떻게 나를 키우고 내가 되게 했는지 나는 이야기해야 한다. (244~245쪽)


1.

이번 휴가 기간 동안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중에 특히 많이 받은 것은 술이다. 내가 술을 잘 먹는 것을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 분들이 정성껏 비싼 술을 선물해 줬다. 하지만 난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술 먹는 분위기와 좋은 안주와 사람을 좋아한다. 술은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 저만치 뒤에 있다. 그에 비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이다. 책을 좋아해 책을 사고,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말한다. 책이 많아 책에 치이고 책을 버리고 또 책을 산다. 그래서 그랬는지 올 환갑 기념 선물의 금지 목록 1위가 책이었다. 내가 정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모두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지 않았다.

딱 한 명 예외가 있었으니, 동녘교회의 길동무 정희수가 책을 선물했다. 그것도 박노해의 신간도서 <눈물꽃 소년>을. 선물을 정리하고 비행기를 타며 내 손에 들려있던 유일한 물건은 바로 이 책이었다. 공항 대기실에서, 비행기에서, 모슬포로 가는 직행 버스에서, 다음날 가파도로 가는 선착장 대기실에서 야금야금 박노해의 책을 읽었다.


2.

'내 어린 날의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박노해의 초등학교 시절을 담고 있다. 박노해라면 우리 시대에 누구나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라고 고래고래 술집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선하다. 그런 그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칠순의 나이에 소환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한 60년대가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형 등 가족에 대한 추억뿐 아니라,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 첫사랑 그리고 친척들,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어린 기평(그의 본명은 박기평이다)의 성장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어린 시절 기억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그의 기억력(혹은 상상력)이다. 나라면 절대로 쓰지 못할 책을 박노해는 썼고, 나라면 그 어린 시절에 품지 못했을 생각과 감정들을 박노해는 품고 있었다. 나와 동시대인지만 이처럼 서울출신 나와 전라도 함평 시골 출신 박기평은 아주 달랐다. 읽는 내내 부러웠고, 읽는 내내 뭉클했다. 


3.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는 어린 시절을 호출한 것일까? 급변하는 현대사회가 놓친 것이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래된 과거에서 미래를 보려는 것일까? 그의 현실 진단은 아래와 같다.


지나온 시대에 비추어 지금 우리는 넘치는 물질과 속도, 첨단과 편리, 기술과 정보, 재미와 자유의 21세기를 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시대가 격변하고 있다. 전능한 기계 인간이 도래하고 인간은 기계가 되어가는 시대. 그러나 문명의 급진보다 더 빠르고 무섭게 인간 그 자신이 급변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정리하고 성찰할 틈도 없이, 갈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나를 휩쓸고 지나쳐간다.

자유 민주 평등의 고원에 선 진보된 '나 개인의 시대'에 성취만큼이나 잃어버린 것 또한 크고 깊어서, 고귀한 인간 정신과 미덕은 땅에 떨어져 내렸고, 수천 년을 이어져온 희망의 씨알은 유실되고 망각되고 있다.

너무 과열되고 너무 소란하고 너무 눈부신 이 진보한 세계 가운데서 우리 몸은 평안하지 못하다. 우리 마음은 늘 초조하고 불안하여 안식하지 못한다. 아이들조차 성공을 재촉당하고 과잉된 보호와 기대 속에 스스로 부딪치고 해내면서 제 속도로 자라지 못한다.

세상이 하루하루 독해지고 사나워지고, 노골적인 저속화와 천박성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지금. 우리는 우울과 무망의 감정에 휩싸여 있다.(242~244쪽)


그러면 그의 답은? 후기처럼 써놓은 맨 앞 인용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그의 책을 읽는 것이다. 멋진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는 장담 못하지만, 멋진 과거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약속한다. 힘들고 고달프고 아련하지만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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