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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y 20. 2024

책 : 맡겨진 소녀

2024. 5. 20.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 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메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순간만을 생각한다. (96쪽)


 


1.

나경호가 책 소포에 슬쩍 끼어 나에게 선물한 책, <맡겨진 소녀>를 다 읽었다. 읽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작 98쪽 짜리 소설이니. 그렇지만 읽고 나서 마음을 수습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소설의 장면들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소녀와 킨셀라 부부의 마음 결이 내 마음 결에 부딪쳐 심란하게 파도가 일었다. 이토록 짧은 소설로 이토록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니. 여러 작가들의 상찬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인용구는 소녀가 집으로 돌아와 킨셀라 부부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의 일부분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이 장면이 주는 감동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영화포스터 컷으로 이 장면을 사용했겠는가.


2.

소설에 대한 인터넷 서점 알라딘 편집장의 소개를 인용하자면 ; "어느 찬란한 여름날의 추억""단번에 읽어 내려간 뒤에는 이 새로운 전율을 표현할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김금희 작가의 독서 후기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정수를 펼친다."는 김보라 감독의 상찬. 그리고 "모든 문장이 문체와 감정을 어떻게 완벽하게 배치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라는 힐러리 맨틀의 추천사부터 "키건은 간결한 단어로 간결한 문장을 쓰고, 이를 조합해 간결한 장면을 만들어나간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부러움 섞인 말까지. 무수한 찬사가 이 104쪽의 얇은 소설에 쏟아졌다.

소설은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았다.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무심한 부모와 지내던 그가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진 어느 여름. 다정히 눈을 맞추며 말해주고, 넘어질까 걱정하며 손을 잡고 걸어주는 따뜻한 어른을 처음 만나본 소녀는 생각한다.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처음 받아보는 관심과 배려 속에서 소녀의 세상은 이제껏 없던 밝은 빛으로 채워진다. 불순물을 날리며 졸이고 또 졸인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순수한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문장과 여백이 자아내는 그 여름의 찬란한 풍경이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자리한다. 영화 '말없는 소녀'로 영상화되어 5월 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 소설 MD 권벼리 (2023.05.26)


https://youtu.be/0LT_NeHia6I?si=J01ynedNaUTDja-5


3.

청소년 소설을 준비 중인 나경호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버림받음과 보호받음, 수다와 침묵, 어린이와 어른, 만남과 헤어짐, 절망과 희망, 그 모든 것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직조되는 이 얇은 소설 속의  세계는 우울하고 어두우면서도  찬란한 빛을 품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킨셀라 부부처럼 말없는 지원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까. 자식을 잃은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켜 속깊은 사랑으로 다시 보살핌의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을까. 수없는 말보다 깊고 따뜻한 침묵의 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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