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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l 02. 2024

오늘 : 풍랑주의보

2024. 7. 2.

1.

6월에는 고사를 지내도 떨어지지 않던 풍랑주의보가 7월 들어오자마자 떨어졌다. 미뤄둔 풍랑주의보를 보충이나 하듯이 오늘내일 연이틀 풍랑주의보가 발령되었다. 오늘은 장마철인데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파도만 높게 이는 희한한 풍랑주의보다. 날씨는 멀쩡한데 풍랑주의보가 떨어져 배는 뜨지 않고, 가게가 문을 닫고, 주민들은 나다니지 않는다.

집안에만 있기도 심심해서 아침 일찍 밥을 챙겨 먹고 가파도 터미널로 출근(?)했다. 배가 뜨지 않으니 시급아르바이트생으로서는 공치는 날이지만, 쾌적한 작업환경에 사방이 탁 트인 터미널은 공부하고 글쓰기에 딱 좋은 장소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으니 점심은 간단하게 빵과 두유로 해결하려고 준비했고, 종일 읽을 책도 챙겨서 출근했다. 컴퓨터를 켜고, 작업창을 열고, 유튜브 채널을 열어 아침에 어울리는 발라드 노래를 틀어놓는다. 모닝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깨우고, 바깥에 나와 바다를 바라보면 물멍을 때린다.

2.

영락없는 공휴일의 한가한 풍경이다. 경기도 일대에는 비가 많이 내려 밖에도 못 나간다는데, 장마철에 접어든 가파도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이상한 날이다. 기상청 날씨 알리미를 확인해 보니 오늘 가파도는 폭염에 강풍특보가 발효 중이다. 내일은 새벽부터 오전까지 비가 내리다 잦아들겠지만 파도는 3.5m 높이까지 오르니 풍랑주의보는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이틀 쉬는 것을 좋아해야 되나 슬퍼해야 되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좋은 방향으로 생활을 꾸려가야겠다.

오전에는 목요일 저녁에 강의할 <중년의 철학 3 - 가족>의 ppt자료를 준비했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중심으로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10년에 걸쳐 귀향하는 오뒷세우스와 20년 동안 남편과 생이별하면서 주변 남자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아내 펠레로페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서 길 떠나는 아들 텔레마코스의 가족이야기가 이번 강의의 핵심이다. 거기에 가족에 대한 정반대의 현대적 흐름을 대변하는 <가족을 폐지하라>는 도전적인 책을 보충자료로 준비했다.

오후에는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부천인문학의 길동무들과 함께 읽고 있는 서동욱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를 읽었다. 야금야금 읽으며, 생각하고 이야기할 거리를 장만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5시쯤 퇴근하여 집으로 가면 저녁을 지어먹고 우치다 다쓰루가 쓴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를 읽으려 한다. 우치다의 책 중에서 난이도 최고봉에 해당하는 이 책은 정말로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반 정도 이해가 되는 짜릿한 책이다. 읽다가 잠깐이라도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줄을 놓치면 그간 독서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지루한(?) 책이다.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을 읽는 맛도 나름 괜찮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우치다의 레비나스 3부작의 마지막 책인 <시간론>에 도전한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3.

바람아 몰아쳐라, 파도야 솟아라. 배야 끊겨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할까 보냐.

이렇게 허세를 떨어 보지만, 사실 월초부터 일이 계속 끊기니 살짝 쫄리기는 한다.

이제 그럴 나이이기도 하다. 이 이중적 마음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쨌든, 오늘은 보람차게 보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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