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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Sep 25. 2024

책 : 미오기傳

2024. 9. 25.

그러니까 어릴 적 나의 독서는 하느님의 ‘황금 배낭’ 같은 것이었다. 하느님은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돌이 든 배낭을 공평하게 나눠주는데 끝까지 들고 간 사람은 배낭 속의 돌이 황금이 되어 있더라, 뭐 그런 식.

성장하면서 나름 체계적인 독서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한 작가에게 흥미가 생기면 그가 쓴 책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상당히 유효해서, 지문만 보아도 누구의 문체인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왜 이 무렵 이런 작품을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43쪽)


세상을 사는 것은 연필처럼 제 몸을 깎아내는 일이었다. 나는 조금씩 줄어드는 몸피를 보면서 나를 스쳐간 시간을 절감했다. 이제 볼펜 몸통에 의지하던 몽당연필처럼 내 삶도 소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 다시 연필로 편지를 쓰고 싶다. 연필 세 자루를 정성 들여 깎아서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나의 연필로 쓰인 문자가 구부리고 펼치고 넘어지며 마침내 날아올라 결승結繩이 되어 그대를 묶게 되기를. 다음 생을 넘어 다다음 생까지 나의 문자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햇빛 유리가 어떻게 내 눈을 찔렀는지 당신이 나의 하루를 알아주기를. (278쪽)



김미옥의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쓰다>는 말 그대로 글 읽는 감각을 느끼며 각 잡고 읽은 책이라면, <이오>은 배꼽 잡고 읽은 책이다. 김미옥의 본캐가 여실히 드러나는 책. 독서가 김미옥은 그의 부캐였다. 나는 '감읽각쓰'의 김미옥보다 '미오기'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음에도 학교 도서관을 키를 쥐고 어떻게든 독서를 하는, 자신에게 덤비는 누구에게라도 선빵을 날리는 어린 미옥에서, 외할머니 강또귀딸과 친할머니 조쪼간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음에도 줄곧 뒤를 따르며 삶의 냉철한 지혜를 캐내었던 손녀 미오기까지. 제사를 떠넘기자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시켜서 자신의 잔칫자리로 만드는 당찬 며느리 미오기에서 두주불사, 주량의 괴력을 발휘하며 직장 남성들과 한판 대결을 벌여 술로 때려눕히는 미오기까지. 평생 돈을 벌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직장인 미오기부터 귀신을 보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무녀(?) 미오기까지. 진짜 매력 덩어리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겠지만.^^) 만약에 내게 미오기 같은 친구가 있다면 나는 정말 깔깔 거리며 킬킬대고 끌끌 차며 꼴꼴 마시면서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아, 우리 얼마 전에 페친이 되었지.^^)


알라딘 편집자는 이 책을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때마다 아픈 과거를 불러내 친구로 만들었던 그의 글에는 폭소와 더불어 가슴 한곳이 뻐근해지는 페이소스가 배어난다. 설익은 신파가 아니라 곰국처럼 오랜 시간 뭉근하게 우려낸 블랙코미디 인생사"라고 평했는데, 나는 읽는 내내 낄낄댔으니 반만 느낀 걸까? ( 아니지, 페이소스야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것이니 아마 베이스로 깔렸을 것이다. 그래도 남자인 나는 여성 미옥의 페이소스는 몸으로 깊이 느끼지 못했으리.)


나는 삶이 무거워 우울해지는 사람보다는 유쾌 쾌 상쾌하게 무거움을 덜어내는 사람을 휠씬 신뢰한다. 미옥은 분명 명랑사회로 가는 길에 멋진 독서인이 될 것이다. 비록 같이 자리를 한 적은 없지만, 그의 존재로 인해 같은 일 - 책 읽고 글쓰는 일 - 에 종사하는 나 역시 든든한 후원군 한 명을 만난 기분이다.


삶이 힘들어 지친 독자들에게 이 명랑하고 상쾌하고 유쾌한 <미오기전>을 권한다.


<사족>

이번 책에는 김미옥이 만나고 겪은 귀신 이야기가 제법 나온다. 납량 특집으로도 최고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귀신을 목격했고, 최근에 가파도에서 추적추적 비 오는 새벽에 떼로 모여있는 귀신님들을 접견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의 귀신담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고 팩트로 받아들였다. 여러분은 귀신을 보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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