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의 근본은 무엇인가? 돌에게도, 벌레에게도, 새에게도 본래 신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고 그러한 신들로 가득한 자연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는 나무로서 우주의 주인공이 되고 산은 산으로서 주인공이 되고 인간은 누구든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된다. 자신 또한 그들의 동료가 되어 풍경은 살아 숨쉰다. 이것이 애니미즘의 공덕이다. (50쪽)
코스모스는 내게 보여서 내가 감상하는 미의 우주다. 반면 만다라는 관찰자가 행위자로서 그 속에 들어갔을 때 성립하는 움직임의 우주다. 그 빛이 다소 부족하다 해도 그 속에 들어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대일여래의 분신이다. 이때 자신과 나무, 자신과 돌, 자신과 고양이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 빛의 앎이 만다라를 휘감는다. (229쪽)
1.
인류학자와 철학자가 하나의 주제 - 여기서는 애니미즘 - 으로 각기 에세이를 쓰고 그를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일본의 인류학자 오쿠노 카츠미와 철학자 시미즈 다카시가 공저한 <오늘날의 애니미즘>이 그 대답이다.
종교에 대한 인류학적 상식처럼 여겨지는 종교의 변천사가 있다. 애니미즘(토테미즘)에서 다신교로,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종교가 발전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태양이나 돌이나 나무, 또는 동물을 섬기는 것을 원시종교로 여겨서 미개하다 생각했다. 과연 그런가? 혹시 일신교(특히 기독교)를 특화한 서양(유럽)인들의 특권적 시각이 아닐까? 그런 논리라면 애니미즘, 다신교, 일신교 다음에 무신교가 종교가 최고로 발전한 단계가 아닌가?
2.
그건 그렇다 치고. 책 제목이 <오늘날의 애니미즘>이다. 그렇다면 오늘날(현재)과 애니미즘의 결합된 것인데, 오늘날과 애니미즘이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저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이야말로 애니미즘적 시선이 각별히 요청된다. 왜일까? 저자들은 오늘날의 현대문명이 이분법적 시선, 주체와 객체, 하나와 다수 등 세상을 둘로 나누고 이 둘 중에 하나를 특권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판단한다. 그 결과가 인간중심주의(주체중심주의)의 폭력과 단절이다. 그렇게 인류는 우리 스스로 세계의 진로를 가르고 막아왔다. 생태파괴, 동물학대, 기후 위기, 코로나 사태는 모두 이러한 태도에 따른 결과이다.
"여러 대립 이항, 예를 들어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 등을 분리해서 사고하거나 혹은 그것들의 상호작용이 불가분해서 각각을 독립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한쪽을 다른 한쪽으로 환원하거나 여하간 그것이 오로지 인간과 자연의 문제로만 고찰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원론적으로밖에 사물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애당초 그러한 주제를 단독으로 다루고자 할 때 이미 실제로는 별개의 대립 이항까지 얽혀 들어 작용하고 있다."(66~67쪽)
3.
이렇게 막힌 통로를 뚫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는 명약관화하다. 공멸이다. 어찌할 것인가? 두 저자는 이 막힌 통로를 뚫는 시선으로 애니미즘을 소환한다. 어떤 관점의 애니미즘인가? "애니미즘이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항상 열어두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물과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면 사물과 생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작용에 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한다. “거대한 ‘타력’을 느끼면서 ‘자력’을 잊지 않는 것, 이렇듯 자유롭고 활기 넘치는 사상으로서 ‘타력’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여기서 말하는 애니미즘이다."(185~186쪽) 애니미즘은 인간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 신화를 기억하자.) 신이 인간이 되고, 곰이 인간이 된다. (그 역도 가능하다.) 일방적인 통로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하나와 다수, 안과 밖에 서로 연결되고 변화되고 이해되고 영향을 끼치는 인드라망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상상력을, 그리고 그 실행력을 애니미즘은 가지고 있다.
4.
두 저자는 애니미즘을 둘러싸고 두터운 철학적, 과학적, 종교적 논의를 덧입혀 시선을 풍부하게 만들고, 그를 통해 애니미즘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면서 오늘날 왜 애니미즘적 시선이 필요한지 꽤나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논지를 펼쳐간다. (책은 어렵지만 너무 재밌어서, 태풍이 부는 휴일 내내 이 책으로 살았다.) 무한과 왕복순환이 가능한 뫼비우스의 띠를 사례로 들어 애니미즘을 설명하는 인류학자 오쿠노 카츠미의 논의가 신선했고, 다양한 원시부족들의 의례나 일본설화(동화) 속에서 발견되는 애니미즘의 시선은 사뭇 흥미진진했다. 거기에 이분법적 시선을 뚫어버릴 삼분법을 이야기하면서 선불교의 다양한 사례를 드는 철학자 시미즈 다카시의 '박력'있는 글쓰기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급 인류학자와 철학자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5.
두 차례에 걸친 논문 제시와 논문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대담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인과론적 시간관을 넘어선 무시무종의 무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동서양의 철학을 과감하게 평가하고 새롭게 갱신하려는 두 지성의 치열한 저술을 읽으며, 우리나라 인류학과 철학의 현주소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책 뒤에 있는 역자후기에도 그런 나의 부끄러움과 유사한 글이 있어 옮겨 놓는다.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근본적인 성찰이란 비서구 사회를 기술하는 서구 인류학자의 작가적 권위가 '객관성'을 선취하는 근대유럽의 '지식 패권주의'와 다름없음을 자각하는 것인데, 한국 인류학계는 그러한 성찰을 제대로 이해지 못했을뿐더러 자기 현장에 반영하지 못했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우리 학계가 자신의 식민지적 한계를 스스로 설정한 결과다. (...) 서구도 아니고 제국의 경험도 없는 한국 인류학계가 앞으로 어떤 인류학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는데도 구래의 인류학적 이론과 방법론을 답습하는 데 머물고 있다. 아마도 이론과 방법론을 '수입'하는 것만으로도 교수나 연구직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적 학계에나 가능한 일이며, 이렇듯 한국 인류학계는 식민지적 한계에 머물러 있다. (......)
우리는 우리의 존재론을 인류학적으로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받아 안게 된다. 내가 일본 인류학계에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일본은 비서구에서 독자적인 지식 세계가 성립된 몇 안 되는 나라 중에 하나이며 또 같은 아시아권인 우리가 사유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참조하기 좋기 때문이다."(327, 329쪽)
그래, 우선 이 책을 읽어보자. 그리고 일본 지성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인류학을 구성하려 하는지 관찰하자. 그리고 우리의 인류학을 새로 구성해 보자. 이렇게 역자는 말하고 있다. 나는 역자의 이 말에 동의한다. 이 책은 그러한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