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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Sep 17. 2024

책 : 다가오는 말들

2024. 9. 17.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어도 이 모양인가 싶어 자꾸 부끄러웠다. 하지만 편견, 무지, 둔감함은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건 아니었다. 결핍보다 과잉이 늘 문제다. 타인의 말은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온전히 들리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 서는 일이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동안 성급한 추측과 단정, 존재의 생략과 차별에 대한 예민성을 기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삶을 담아내려는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 (7~8쪽)




풍랑으로 강제 휴가를 얻었을 때, 모슬포에 있는 어나더 페이지에 들러 의무적으로 산 책이 은유의 <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었다. 날씨가 풀려 가파도로 출근한 오늘 이 책을 배낭에 담았다. 오늘은 추석이다.


가파도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오랜만에 여객선이 만석에 가까웠다. 배에서 이제는 친숙한 제주도 말을 들으며 출근했다. 추석이라 고양시에 집은 친척들로 분주할 것이다. 집안 청소며 음식장만은 여자들의 몫이겠지. 가족들끼리 모여 흥성하게 추석을 쇠기 위해서 여인들이 하는 노동은 의무처럼 당연시되었다. 우리 집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오랜만에 휴일이라고 늦잠을 잘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오고 가는 방문객을 응대하며 은유의 책을 틈틈이 읽는다. 은유의 책은 거의 다 구입하여 읽었기에 이번에 책 역시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이전의 느낌과는 약간 다르게 더 작가 자신의 생활에 밀접한 글을 썼다. 뿐만 아니라 딸로, 엄마로, 며느리로 살아가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그득이다. 읽는 내내 뜨끔하고 아프지만, 그 아픈 각성이 괴롭지는 않다. 시간을 내어 내밀한 여성의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남성으로, 나에게는 아주 귀중한 기회였다.

특히 부불노동으로, 미덕으로, 의무로 취급되는 여성의 노동에 대하여 곳곳에서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작가로, 글쓰기 강사로 살아가는 은유의 삶이 날 것처럼 전달될 때,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여성이 아니기에 느낄 수 없었던 미세하고 깊은 결을 느끼며 아파할 수 있었다. 은유의 목소리가 글로 옮겨져 나에게 이해와 공감의 말이 되었다.


자아정체성이 공고할수록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꼰대'가 되어가는데, 그 백신으로 은유의 책은 최상급이다. 특히 여성노동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추석날 이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는 우연한 축복이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기록에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권장할만한 책이다. 특히 남성이 읽었으면 좋겠다. 읽으며 밑줄 친 부분 하나를 인용한다.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 원래 그래'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언제 잊었는지도 모르는 첫사랑처럼 순간 멀어졌던 그것, 무수한 사유의 새순을 피워 올리는 '어정쩡함'이라는 단어를 이 봄에 다시 내 것으로 삼는다."(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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