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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Dec 10. 2024

책 : 생각의 음조

2024. 12. 10.

만연한 불안의 분위기는 희망의 씨앗을 질식시킵니다. 불안사회에는 우울한 분위기가 퍼집니다. 불안과 적대감은 사람들을 우파 포퓰리즘으로 인도합니다. 이기심과 혐오를 부추깁니다. 연대와 친절과 공감은 서서히 붕괴됩니다. 증가하는 불안과 커져가는 적대감은 사회 전체를 난폭하게 만듭니다. 한국 사회는 완전히 난폭해졌습니다. 혐오 발언 역시 불안의 산물입니다. 불안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합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퇴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불안에 굴복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 불안과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화해와 대화의 분위기에서만 번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불안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권위주의 체제를 조장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지금 그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안 때문에 어떻게 민주주의가 파괴되는지 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트럼프, 그 악마가 불안을 조장하고 있습니다.(161~162쪽)



 1.

탄핵은 일시적으로 무산되었지만, 탄핵시위는 계속될 뿐 아니라, 점점 축제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80년대의 화염별과 돌이 시위대의 무기였다면, 2010년대의 무기는 촛불이었고, 2020년대의 무기는 응원봉이다.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애도에서 응원으로 바뀌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시위는 전 세계에 K-데모의 모델이 되고 있다. 절망 중에서 우리는 노래한다. 분노 중에서 우리는 춤을 춘다. 대중의 힘은 축제가 된다.

축제는 지치지 않는다. 우리는 울면서 춤을 추며 전진한다. 언제까지? 이 광기의 폭력을 멈출 때까지, 끝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끝내지 않는 한 끝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품은 분노의 마음이 전국에서 바리케이트가 되어, 군인을 몰아내고, 경찰을 막아내고, 역사를 전진시킨다. 나는 이 탄핵 축제의 물결이 눈물겹도록 자랑스럽다.


2.

12월 9일 제주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이 있는 날이다. 전날밤에 가파도에서 나와 모슬포에 머물면서, 한병철의 신간 <생각의 음조>를 가지고 나왔다. 일찍부터 금식을 해야 해서 저녁을 서둘러 먹고,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잠자리에 누워 한병철의 신간을 읽는다. 엄밀히 말하면 출간을 위해 쓴 책은 아니고,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3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중강연집이다. 물론 한병철은 대중강연을 위한 원고를 썼고, 그 강연 원고가 번역되어 나왔다. 한병철의 저서가 개념적 밀도가 높은 철학저술이라면, 이 강연집은 밀도 대신에 친밀도를 높였다. 한마디로 쉽게 읽힌다. 그러니 한병철 철학을 어려워했던 독자들이 접근하게 좋은 책이다.

강연집이라 해서 한 없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연은 현장감이 있어야 하고, 철학적 대중이 아니라 일반대중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 조정은 불가피하다. 이 강연집은 그동안 써왔던 한병철 책의 정신을 밝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타자의 소멸'에 대한 다양한 변주가 한병철 철학이다. <피로사회>로부터 <불안사회>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저술은 모두 '타자의 소멸'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모색이라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2024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병철 책이 두 권이나 더 번역되어 나왔다. 책을 읽다가 확인하고 잽싸게 주문해 두었다. 김영사에서 10월에 나온 <관조하는 삶>과 다산초당에서 11월에 나온 <불안사회>(원제는 '희망의 정신')이다. 이에 대해서는 책이 도착하는 즉시 읽어서 후감을 정리해 올리려 한다. 

3.

강연집은 세 개의 강연원고를 수록하였다. 1. 생각의 음조, 2. 에로스의 종말, 3. 희망의 정신. '생각의 음조'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콘서트 홀에서 피아노 연주와 함께 진행하였는데, 책에는 연주곡명이 있어, 나도 책을 읽을 때 바흐와 슈만의 곡을 배경음으로 깔아봤다. 독서하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평소에 피아노의 음률처럼 자신의 생각에 날개를 달고픈 한병철의 마음이 읽히는 듯싶다. '에로스의 종말'이나 '희망의 정신'은 자신의 책에 대한 소개임과 동시에 한병철의 철학 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강연이다. 이번에 나온 <불안사회>를 읽기 전에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었다.


4.

됐다. 한병철 책은 문장문장마다 밑줄이라 모두 소개할 수 없으니 대표적인 몇 대목만 소개하자. 먼저 <생각의 음조>에서는 다음 구절을 꼽았다.


우리는 오늘날 끊임없이 스스로를 생산합니다. 이런 자기 생산은 시끄럽습니다. 고요해지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고요함은 이름 없음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의 주인도, 내 이름의 주인도 아닙니다. '나'는 내 집에 머무는 손님일 뿐입니다. 이 이름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많은 소음을 발생시킵니다. 강해지는 자아는 고요를 파괴합니다. 고요는 내가 뒤로 물러나 이름 없는 채로 있을 때, 내가 완전히 약해질 때, 또는 평화롭고 친절해질 때 존재합니다. (52쪽)


다음으로 <에로스의 종말>에서 꼽은 문장 ;


타자를 어루만지는 손은 치유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손은 고통을 완화시킵니다. 타자와의 신체적 접촉은 분명 치유력이 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만성통증이 지배적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70~75퍼센트가 만성통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늘 어딘가가 아프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어딘가에서 통증을 겪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더 이상 접촉하지 않는,  접촉이 부재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회는 만성통증을 야기합니다. (104~5쪽)


선물은 상대방을 향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상대방에게 선물을 전합니다. 악수와 시가 차이는 없으며, 악수는 선물입니다. 첼란이 보기에 오늘날 우리는 시도 없고 신체적 접촉도 없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현대인들은 시를 거의 읽지 않는데, 그것은 타자성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타자를 열망하는 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모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만 존재할 뿐입니다. (106쪽)


마지막으로 <희망의 정신>에서, 


축제가 없는 시간은 희망이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초월성이 전체적으로 소비, 생산, 소통의 내재적 특성을 자리를 빼앗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희망은 생산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 이전에 있었던 적 없는 것,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향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바울의 지혜는 무엇인가요? 희망의 양식은 '아직-아님Noch-Nicht'입니다. 희망은 앞으로 도래할 것, 가능한 것, 새로운 것을 향해 열립니다.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지우진 것, 이미 보여진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존의 나쁜 것을 넘어서게 하는 정신의 태도이자 정신의 기분입니다. (138쪽)


희망은 완전한 상실, 총체적 절망을 겪었을 때 그 눈을 뜹니다. 이러한 부정성이 바로 희망과 낙관주의를 가르는 요소입니다. 희망은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행복이 그러하듯, 깨진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희망이 가진 내재적 특성입니다. 희망은 절대적인 재앙에도 불구하고 피어날 수 있습니다. 희망의 별은 나쁜 별(라틴어로 '데스-아스트룸des-astrum'), 즉 재앙에 접해 있습니다. 재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가진 부정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그저 낙관주의의 진부함뿐입니다. (171쪽) 


5.

그리고 그는 강연의 말미에 파울 첼란의 시 <스트렛토>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강연을 마감한다. 나는 그 시를 페북에 올렸다. 추위에 떨고 있는 시위대에게, 불안에 지쳐있는 시민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별은 

여전히 빛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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