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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Apr 11. 2020

금강경 명상 9 : 一相無相分

9장.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이 경지를 얻었노라" 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2.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라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내음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만 수다원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4.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사다함을 이름하여 '한번 왔다갔다 할 자'라 하지만, 그는 실제로 왔다갔다 함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6.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올 자'라 하지만, 실제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만 아나함이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8.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실제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법이 도무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9.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의 사람중에서 가장 으뜸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라는 이같은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10.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란나의 도를 얻었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제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수보리야 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긴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 8 부파불교(소승불교)에서 말하는 4개의 계위는 다음과 같다. 이를 다문사과(多聞四果)라한다.  

1. 수다원須陁洹 : 입류(入流)-영원한 흐름에 들어간 자 - 예비단계

2. 사다함斯陁含 : 일왕래(一往來) - 한 번 오는 자 – 마지막 윤회단계

3. 아나함阿那含 : 불래(不來) -다시 안 오는 자 – 번뇌를 완전히 끊은 단계

4. 아라한阿羅漢 : 응공(應供) -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 


   須菩堤。 於意云何, 須陁洹能作是念, 我得須陁洹果不?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陁洹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陁洹。 須菩堤。 於意云何, 斯陁含能作是念, 我得斯含陁果不?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含陁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陁含。 須菩堤。 於意云何, 阿那含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名爲不來, 而實無來, 是故名阿那含。 須菩堤。於意云何, 阿羅漢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名阿羅漢。 世尊。若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壽者。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我得阿羅漢道, 世尊則不說須菩堤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堤實無所行, 而名須菩堤是樂阿蘭那行。


Subhuti, what do you think? Does a disciple who has entered the Stream of the Holy Life say within himself: 

Subhuti said : No, World-honoured One. Wherefore? Because "stream-entrant" is merely 

a name. There is no stream-entering. The disciple who pays no regard to form, sound, odour, taste, touch, or any quality, is called a Stream-entrant. 

Subhuti, what do you think? Does an adept who is subject to only one more rebirth say within himself: I obtain the fruit of a Once-to-be-reborn?

Subhuti said : No, World-honoured one. Wherefore? Because "Once-to-be-reborn" is merely a name. There is no passing away nor coming into existence. [The adept who realizes〕-this is called "Once-to-be-reborn."

Subhuti, what do you think? Does a venerable one who will never more be reborn as a mortal say within himself: I obtain the fruit of a Non-returner?

Subhuti said: No, World-honoured One. Wherefore? Because "Non-returner" is merely a name. There is no non-returning; hence the designation "Non-returner."

Subhuti, what do you think? Does a holy one say within himself: I have obtained Perfective Enlightenment?

Subhuti said: No, World-honoured One. Wherefore? Because there is no such condition as that called "Perfective Enlightenment" World-honoured One, if a holy one of Perfective Enlightenment said to himself "such am I," he would necessarily partake of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World-honoured One, when the Buddha declares that I excel amongst holy men in the Yoga of perfect quiescence, in dwelling in seclusion, and in freedom from passions, I do not say within myself: I am a holy one of Perfective Enlightenment, free from passions. 

World-honoured One, if I said within myself: Such am I; you would not declare: Subhuti finds happiness abiding in peace, in seclusion in the midst of the forest. This is because Subhuti abides no where: therefore he is called, "Subhuti, Joyful-Abider-in-Peace, Dweller-in-Seclusion-in-the-Forest."

                 

<짧은 명상>

부파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따라 4개의 층위를 나누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우리가 나한(羅漢)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아라한이다. ‘궁극적 깨달음에 도착한 자’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그래서 응공(應供)이란 별명이 따른다. ‘대접 받아 마땅한 자’라는 뜻이다. 

종교집단이든 회사든 신분이 있다. 기독교 교회로 말하자면, 집사, 권사, 장로, 목사 등이 있다. 그 직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거나 남용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섬김과 겸손의 존재가 권력과 권위의 존재로 변한다. 유동적 조직은 경직화되고, 열린 조직은 닫힌다. 흘려야할 물이 고이게 된다. 썩는다.

진짜 문제는 자기가 썩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다. 밖으로는 썩은 냄새가 넘쳐나는데, 코를 쥐고 고개를 흔드는 자를 도리어 욕한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구원에 이르려면 멀었다고, 지옥에 갈거라고. 이를 어쩔 것인가? 

자신의 직위를 의식하는 자, 이미 그 직위를 가질 자격을 잃게 된다. 남이 대접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이 대접해주길 바라는 자는 대접받을 만한 자역을 상실한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예수는 “대접을 받고자 하면 대접해 주라”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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