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 테츠시(山名哲史), 《반야심경》(불광출판사, 2020)
<반야심경 명상>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연재하던 중 이전에 서평으로 썼던 독서노트가 떠올랐습니다. 참고 하시라고 명상 연재에 부록편으로 다시 올립니다.
여기에 물이 든 컵이 있고, 컵 겉면에 ‘독약’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시다. 자, 당신은 이 컵 안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까. 마실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할 것도 없이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신다’라고 하는 행위가 ‘죽는다’라고 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인과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몰랐다면 아무렇지 않게 마셨을 겁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마시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안다’라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깨닫다’라는 말을 씁니다. 이 ‘깨닫다’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안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오류 없이 바로 아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합니다.
깨달음과 반대의 상태를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이라고 하면 뭔가 무서운 느낌이 들지만 실은 그것은 ‘무지(無知)’, ‘모른다’라는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깨달은’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옮겨간다고 하면 뭔가 어려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쓰는 나날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앎’을 통해 나의 행동 방식, 곧 내 삶의 방식을 바꿔 가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20~21쪽)
내가 다니는 교회는 감리교단에서 파문당한 홍정수 목사님이 설립한 동녘교회다. 감리교단에서 홍정수 목사님을 파문할 수는 있었지만, 그가 설립한 동녘교회를 없앨 수는 없었다. 동녘교회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작은 교회다. 홍정수 목사님은 현재 미국에 사시면서 일 년에 한 번은 귀국하여 교회를 방문하신다. 1년마다 듣는 설교는 참으로 놀랍다. 많은 설교문들이 기억나지만, 이번에 말하고 싶은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종교생활을 한다. 은총이니 구원이니 회개니 천국이니.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러한 언어는 관심도 없다. 자, 그렇다면 기독교의 용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일상어(user friendly language)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할 때, 21세기에도 기독교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일까? 수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만의 ‘방언’으로 종교적 교리를 이야기한다.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인들만이 소통되는 방언이 있고, 불교인들도 불교인들만이 소통하는 방언이 있다. 사성제니 팔정도니 번뇌니 해탈이니 용어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낸다. 불교경전을 21세기에 사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까? 그러한 갈증으로 쓴 책이 야마나 테츠시(山名哲史)가 쓴 《반야심경》(불광출판사, 2020)이다. 같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던 최성현이 번역하였다. 부제로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을 붙였다. 일본에서 30년간 큰 사랑을 받았다하니 허명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반야심경은, 아니 불교 전체는 행복에 대한 방법이라고.
붓다의 중심 테마는 ‘행복’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가 찾았던 것은 행복의 노하우였지 철학도, 학문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불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론적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면이 있지만,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보았을 때는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54쪽)
지은이인 야마나 테츠시는 스님이 아니라, 프랑스철학을 소개하는 재야 철학자이다. 그는 불교를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일반인의 언어로 반야심경을 설명하였다. 읽어보니 술술 읽힌다. 하지만 읽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을 바꿔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안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수행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책은 지도에 불과하고, 그 지도에 나와있는 길을 가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불교지도를 하나 얻었을 뿐이다. 이것이 보물이 되는지, 휴지가 되는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추신> 나 역시 기독교의 평신도로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를 ‘인문학의 언어’로 쓴 바 있다. 《제 정신으로 읽는 예수》(삶창, 2016)이다.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