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없는 미지의 포도 맛이 매일 궁금합니다.
오늘은 화이트 와인, 내일은 레드와인.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맥주를 끊어야겠다는 당찬 결심하에 와인으로 차선 도로를 갈아타듯 은근슬쩍 그렇게 갈아탔다. 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전혀 모른다. 어쩌다 보니 와인의 매력에 빠져 들었고 점심식사에 초대를 받거나 할 때도 로제 와인 한병을 사들고 갈 만큼 와인과 난 찰떡궁합이 되었다. 그렇다고 엄청난 와인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외우고 암기해서 유식한 척을 할 수 있는 정도도 전혀 아니다. 그냥 좋다. 그냥 좋아한다. 와인을. 새로운 한병 한병을 오픈할 때마다 호기심 가득 채운 머릿속의 맛과 미지의 세계가 듬뿍 들어 있는 포도 맛으로 초대해주는 와인이 좋다.
처음 와인을 만나게 된 우연은 집 근처에 코딱지 만한, 대략 버스 한 대 크기 정도 와인 샵이 있었다. 베트남에는 크고 화려한 와인 가게가 많다. 심지어 이태리 주인이 직접 운영하는 와인 가계가 있을 정도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산책을 하다 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말나 온 김에 우린 집 앞 구멍가게와 흡사한 와인샵으로 들어갔다. 와인에 대해 ‘와’ 자도 모르는 우리가 굳이 크거나 유명한 와인샵을 간다 한들 달라질 상황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집 앞 와인 샵으로 들어갔다. 멋모르고 운동화 신은 발로 무턱대고 턱 하니 들여놓은 와인 세계가 이토록 흥미로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와인과의 첫 만남은 어느 노처녀가 자기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등 떠밀려 나간 선자리에서 평생을 함께 할 백마 탄 왕자를 만난 순간과 아주 흡사했다. 눈이 땡그랗고 얼굴 형태가 동글동글 하니 매우 친절한 다람쥐 같은 주인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인상 적이 었다. 약간 하이톤의 목소리였다. 방긋방긋 웃으며 안하무인인 우리를 와인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늦은 저녁 와인가게 셔터를 닫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맨발로 카펫을 이리저리 오가며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었다. 난 무조건 ‘드라이’ 맛을 좋아한다 했다. 화이트 와인의 즐거움은 아직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지만 우선 처음이니 가벼운 것부터 시작을 권했고 ‘모다’로 난 시작을 했다.
함께 살고 있는 남자 사람이 옆에 살고 있는 여자 사람을 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씩 맥주 한 캔을 혼자 시원하게 들이키다 야속하게 확 쪄버린 살을 죽을힘을 다해 돈을 써가며 운동을 다니는 마누라를 보고 있자니 한심 했었나 보다. 와인을 권유하고선 요즘 그도 한잔씩 마시기도 한다. 둘이 함께 들어간 길쭉하고도 좁다란 미지의 와인가게에서 첫날 우리는 30분 정도 머물렀다. 그곳은 우리 삶에 새로 초대된 공간이고 와인 주인도 새롭게 알게 된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그녀는 와인바도 직접 운영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단 한 번도 와인 바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적은 없다. 주변 친구들을 통해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녀가 길모퉁이 코너 와인바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드라이 맛에 레드 와인을 찾는 왕 왕 초보 우리에게 주인은 와인 한 병 한 병을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소개해 주었다. 와인의 맛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를 해가며 마치 그녀가 지금 그 와인을 음미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묘사를 해주었다.
난 궁금했다. 그 맛이 무슨 맛인지. 도대체 와인에 무슨 맛을 표현하기 위해 저토록 귀엽고 앙증맞은 과일 종합 선물 세트 표현을 사용하는지. 와인의 맛이 정말 저렇게 다 다른지. 그 구별의 기준은 무엇인지. 어떤 와인은 설명 도중 그녀의 입에 침이 고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난 와인 설명보다 그녀에게 반해 버렸다.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와인을 팔고 있는 장사 사람 이기 이전에 정말 와인과 사랑에 빠져 한병 한병 그 와인들이 전하는 풍미와 맛을 몸소 느끼는 와인 여신이었다.
난 구정 때 강렬히 나를 사로잡을 새로운 와인 향과 맛을 느껴 보고 싶었다. 하루 3끼, 독재자 포스로 마음대로 메뉴를 정해 하루 3끼 3일을 집밥으로 연이어 해결하고 나니 나의 심신과 정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약간 달콤하면서 과일향이 듬뿍 담겨 톡 쏘는 듯한 화이트 와인이 절실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린 격한 구정 인사를 했다. 난 나의 본능에 충실하기 위해 와인 탐색을 시작했다. 식탐도 굳이 없는 난, 혀끝에서 아련히 울려 퍼지는 와인 맛에 노예가 되었다. 와인 설명 도중 입안에 군침이 돌았던 그녀의 모습이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자라고 있었다. 신비롭고 각기 다른 불투명 붉은빛과 투명 빛에 매료되어 자기 전에 반잔은 나의 정신을 충분히 무장해제시켜 주었다. 무서운 와인 반잔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망설이고 고민하던 나의 글을 3번 정도의 점검 절차만 거친 뒤 브런치에 발행 버튼을 누르게 해 버린다. (보통 하루정도 묵혀 두었다 다시 읽고 고치고 수정한뒤 발행을 하는데...)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놀란 가슴을 쓰다듬고 수정 버튼을 누른 뒤 다시 수습을 한다. 그런 와인이 참 좋다. 나 자신에게 반항 할수 있는 힘을 가져다 주는 와인 반잔이 대견하다.
제일 첫날 ‘모다’를 가볍게 한잔을 마셨다. 알코올 냄새가 유난히 많이 풍겼다. 가격이 워낙 저렴한 와인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남편은 매우 흡족해했다. 나에겐 별로였다. 한 주 뒤 다시 와인 가게를 찾았다. 자초 지성 설명을 하고 그녀는 내가 원하는 알 수 없는 와인맛을 찾기 위해 한 단계 한 단계식 매주 업그레이드된 와인을 추천 중이다. 그녀의 지도 아래에 난 새로운 와인을 끝도 없이 맛보는 중이다. 너무 값비싼 와인은 그녀도 추천하지 않는다. 기본 5만동은 항상 디스카운트도 해준다. 그녀는 우리에게 와인 라벨을 읽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포도 종류, 와인회사, 포도밭, 수확연도, 포도재배업자, 양조장 등 굵직굵직한 라벨들만 우선 알려 주었다. 그녀는 유달리 포도밭을 강조했다.
처음에 자주 먹었던 이태리 와인 라벨에 대해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면
Abboccato 아주 조금단
Amabile Amarone 반쯤 단 드라이
Annata수확 연도
Azienda agicola 포도를 직접 재배하는 와인 회사
Bainco화이트
Casa vinicola와인회사
Rosato로제
Rosso레드
Secco드라이
이 정도 대충 알고 있고 지역에 대해 가끔 어렴풋이 듣고선 잊어버리는 과정을 반복 중이다. 사실 나에게 크게 상관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저 수많은 레벨 용어보다 와인병에 붙어 있는 디자인 라벨이 더 매력적일 때도 있다. 화려함에서부터 고급스러운 빈티지 디자인까지. 천차만별인 와인 라벨 디자인을 보고 있으면 미술전시회에 온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킨다. 라벨의 영감과 맛이 딱 맞아떨어질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소믈리에나 와인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례하거나 무식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난 그저 나에게 맞는 와인을 찾는 기쁨이 좋다. 와인이 사람에 따라 맛도 달라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맞는 와인을 찾고 나면 그때서야 이름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무슨 포도를 사용했고 얼마나 숙성시킨 와인 인지 등 관심을 쪼금 가지기 시작한다. 꼭 코르크 마개 와인이 아니더라도, 숙성 기간이 길지 않더라도 저녁에 안겨주는 설렘만 있다면 난 그 와인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
최근에 빠져 있는 와인은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과 호주산 레드, 화이트 와인이다. 약간의 스파클링과 그야말로 온갖 과일 향에 흠뻑 젖어 있는 이 와인은 요즘 한 대낮에도 생각이 난다. 레드 와인보다 점점 화이트 와인에 빠져 들고 있는 요즘이다.
삶 속에 와인이 들어왔다. 잘은 모른다.
가끔 와인의 힘을 빌어, 브런치에 발행 버튼을 누르게 될 것도 같다.
그럼 다음날 새벽에 다시 수정을 하고 다시 발행 버튼을 누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