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답과 기도
만약에 내가 그때 성당에 가지 않았고, 그때 리타 대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 기도하는 나는 없지 않았을까. 후에 또 다른 초대를 알아차리고 신앙을 갖게 되었더라도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만남 자체도 소중하지만 언제 어떻게 만났는가도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하며 그때의 인연에 의미를 부여해본다.
매일 성경을 쓰고 있다. 욕심껏하면 자주 빠뜨리게 될 것 같아서 소박하게 매일미사 그날그날치 독서와 복음말씀을 손필사도 아니고 온라인 필사로 하고 있는데 엄청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의 힘을 알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매일 쓴다는 것도, 매일 '성경'을 읽는다는 것도.
쓰면서 모두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다. 그냥 쓴다는 데 의의를 두는 날도 허다하다. 개의치않는다. '매일'은 조그맣고 단순하고 가볍다. 매일중 어느 '하루'는 조금 크고, 조금 무겁고, 조금 복합적이다. 성경 쓰기를 거기에 대입해봐도 똑같다. 매일 모든 말씀이 다 다가오고, 의미있지 않다. 그러던 중 오늘, 하느님의 훈육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말씀, 사랑하는 자에게 훈육하신다는 말씀같은 구절을 만나면 조금 특별해지는 것이다.
요즘처럼 올바른 훈육을 하기도 어렵고, 훈육을 듣고 자양분 삼기도 어려운 때에도 이런 말씀이 왜 귀에 들었을까. 보통 조용한 새벽에 쓰는데 오늘은 뉴스기사를 보다가 성경쓰기를 펼치고 기사 속 영상을 중지않지 않고 그냥 보면서 써서 그렇다. 영상 속에서 애국자이며 자유민주주의 신봉자가 자신의 행위 일부에 대해 직접 변론을 하는 것을 보고 있어서 그렇다. 나는 정말 애국자도 싫고 자유민주주의도 싫다고 생각하며 하느님은 왜 그를 외면하시는가를 물으면서 썼다. 귀가 닳도록 말씀하시는데 들을 귀가 없는 것인가 물으면서 썼다. 저런 자들을 위한 특단의 조치, 특단의 훈육법을 따로 준비하시지 않으셨을 단정하고 정직한 하느님을 상상했다. 그는 그냥 그가 가진 하나의 방법, 말씀으로만 훈육하시는 거겠지. 사실 그게 맞는 거겠지. 수십억 인간 하나하나에 맞춤한 훈육법을 가질 수 없으실테니까.
올해 들어 연말까지, 매일 저녁 9시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주모경을 바치도록 하고 있다. 어느 범위에서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제는 알람을 맞췄다. 노답인 시국, 정국이라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이 원하시는대로 되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아픈 아빠를 위해서도 얼른 낫게 해달라,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무색해서 어느날부터는 아빠가 살아있음을, 살아서 냄새를 맡고 공기를 느끼고 꽃을 보고 비를 볼 수 있음을 감사하게 느끼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또한 달리 답이 없어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