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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Feb 17. 2023

#4. 주변인들의 식사

소설 연재/  빨간 지붕에 숨어

'입맷거리'라는 말이 있다.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의 음식, 이라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이다. 최근 수빈의 식생활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이보다 적절한 어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언어로는 설명이 어렵다. 영어도 체코어도, 찾아보면 유사한 말이야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의 음식이라니, 토씨 하나도 틀림없이 완벽히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수빈에게 먹는 행위란 입맷거리를 욱여넣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식생활보다 엉망인 건 정신건강이다. 육체는 최소한의 끼니라도 챙겨서 어떻게든 지탱하고 있지만 폐허가 된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어차피 채울 수 없는 거라면 말끔히 비워내고 싶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마음이 꼭 풍선 같아.'


어젯밤 일기장에 끄적였던 짧은 문장 하나가 내내 수빈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마음이 풍선 같다는 얘기는, 그러니까 끈이 떨어진 부유물처럼 불편하게 떠 있다는 얘기다. 사정거리 안에는 있지만 잡을 수가 없어서 더 멀리 사라질 때까지 아쉽게 바라만 봐야 하는 놓쳐버린 풍선. 딱 그런 형국이다. 이탈해 버린 마음은 어디로 튈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과거와 현재를 제멋대로 오가며 언제고 어디서고 수빈의 머릿속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가시버시,라는 말 들어봤어?"

"글쎄~ 그런 말도 있어?"

"자기도 처음 들어보지? 무슨 뜻이게? 한번 맞춰 봐."

"음... 가십거리? 대충 그런 뜻인가?"

"땡! '부부'의 순우리말이래. '가시'는 아내, '버시'는 남편이니까 가시와 버시를 붙이면 부부가 되는 거지. 어때? 재밌지?"

"오호~ 근데 왜 이렇게 생소하지? 요즘은 거의 안 쓰는 말 같은데?"

"부부를 속되게 낮잡아 부르는 말이라서 잘 안 쓰는 거래.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수명이 따르는 법이니까.

그래도 누군가는 기억하잖아. 지금 우리처럼."

"우리 서방님, 오늘따라 말을 참~ 예쁘게 하시네요."

"오늘만? 흐흐."

"뭐야 그 능글맞은 웃음은? 하여간 우리말은 알면 알수록 묘해. 지구상에 있는 언어들 중에 이렇게나 복잡하게 아름다운 말은 아마 없을 거야."



둘이라서 찬란했던 순간들은 하나로 흩어짐과 동시에 빠르게 빛을 잃어갔다. 해국이 식당에 걸어둔 흑백사진들처럼 색이 바래졌다. 지나간 대화 속의 그 말. 가시버시. 수빈에겐 그와 함께 보낸 모든 시간이 꼭 가시버시처럼 느껴진다. 어느 순간에는 분명히 자리했지만 쓸모를 잃고 사라진 지금에는, 존재의 유무조차 의심하게 되는 그런 형편이 된 것이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청량한 해국의 음성이 수빈에게 드리워진 먹구름을 슬며시 걷어낸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동반한 정갈한 한상이 눈앞에 차려졌다. 도라지와 시금치, 고사리와 표고버섯, 당근과 무생채가 이렇게 예쁠 일인가. 잘게 다진 소고기도 먹음직하게 볶아졌다. 노른자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달걀프라이는 비빔밥의 자존심을 지켰다. 곁들여져 나온 어묵볶음과 콩자반 같은 밑반찬에도 자르르 윤기가 돈다.


"오늘 마민카 정식은 비빔밥이 메인이고요. 국은 북엇국을 좀 끓여봤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식기 전에 같이 드세요."


처연한 수빈의 시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그릇 위에 걸린다.


"냄새가 좋네요. 잘 먹겠습니다."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짓는 해국이 조용히 돌아서려는데 수빈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멈춰 세운다.


"저기... 일행이 오고 있는데요, 같은 걸로 하나 더 만들어 주시겠어요?"


수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동시에 입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 작은 동요가 인다.


"으~~ 추워~~ 형! 나 배고파~~"


예상에 없던 지호의 등장은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기류뿐 아니라 내부의 공기마저 빠르게 바꿔 놓았다. 뭐라고 딱 꼬집어서 설명할 길은 없지만 그의 출현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일으킨 것만은 틀림없다.


"어? 손님이 계셨네?"


사람마다 내뿜는 에너지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수빈은 해국과 지호를 통해 새삼스럽게 깨우치는 중이다. 비슷한 또래의 두 남자. 그러나 전혀 다른 이미지. 재미있는 투샷을 감상하던 와중에, 뒤이어 한번 더 휑하니 찬바람이 일더니, 간발의 차로 늦은 단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우 추워! 언니~ 오늘 왜 이렇게 춥대?

나 진짜 얼어 죽을 뻔. 으~~”


앓는 소리와 달리, 연신 해맑은 얼굴로 수빈을 보는 단비. 싱그럽게 웃는 낯으로 공간을 밝히는 그녀다. 이로써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해국과 수빈, 지호와 단비.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정에 의해서든 원래의 둥지를 떠나왔다는 것. 자의든 타의든 이방인의 삶을 선택했다는 뚜렷한 교집합이 성립된다. 태어난 곳은 대한민국이지만 지금 밟고 서 있는 땅은 유럽이다. 유럽 중에서도 체코. 체코 중에서도 수도인 프라하에서 우연처럼 운명처럼 마주하게 되었다.


"비빔밥 시켰어? 오~ 비주얼은 나쁘지 않은데?"

"이집 정식인데 요일별로 메뉴가 바뀌나 봐. 배 많이 고프지? 나 아직 입 안 댔으니까 너 먼저 먹어."

"아니야 언니~ 나도 시키면 되지."

"같은 걸로 주문해 놨어. 금방 나올 거니까 일단 너부터 한술 떠, 응?"

"헷. 염치없지만 그럴까요, 그럼?"


한편, 지호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몸은 해국을 바라보고 있지만 귀는 등 뒤로 열려 있다. 혹여 수빈과 단비의 대화를 놓칠까 봐 부동자세로 목을 빼고 앉아있는 꼴이 해국은 몹시 신경 쓰이는 눈치다.


"뭐 하냐! 밥집에 왔으면 주문을 해야지."

"쉿! 가만히 좀 있어 봐."

"주문 안 해? 배고프다며~"

"알았어~ 알았어~ 근데 형! 저기 둘, 아는 사람이야? 누구야?"

"알긴 뭘 알아. 내 손님들한테 관심 끊고 너는 조용히 밥만 먹고 가는 거다, 알겠냐?"

"뭐야. 내 손님? 와~ 이제 손님 생겼다 이거지? 와~ 나... 이 배신감을 어떡하지."

"시끄럽고! 형님은 음식 만들어야 하니까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좀 계시라고요. 이 무늬만 손님아."

"에헤이~ 걱정 마세요, 사장님.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네?"


조심성이 많은 해국과는 달리 지호는 매사에 거침이 없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 그런지 한국에 있는 보통의 또래들과는 결이 다르달까.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이 말하면… 불안불안하다. 밉상은 아닌데 때때로 거슬리게 한다. 스물아홉과 스물일곱. 그래봐야 두 살 터울이지만 한참 아래뻘 동생처럼 막무가내로 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해국은 묵혀둔 속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기한다.


'저 녀석, 생긴 건 부잣집 도련님인데 하는 짓을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니까.'


이 구역의 럭비공인 유지호. 그는 벌써 행동을 개시했다. 노심초사하는 해국의 마음 같은 건 지호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어~ 형! 그거 이리 줘."


해국이 주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잽싸게 음식을 낚아채서는 수빈과 단비 앞으로 돌진하는 지호. 말리고 어쩌고 할 새도 없이 별안간 벌어진 일이다.


"안녕하세요~"

"아... 네..."

"주문하신 음식 드릴게요. 여기에 놓아 드리면 될까요?"

"네, 저한테 주세요."


수빈이 손을 내밀자 지호가 과한 제스처를 부리며 극구 만류한다.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뜨거우니까 손 조심하시고요. 자~! 여기요! 그나저나 메뉴 고르시는 센스가 탁월하십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이집 음식이 별로 자극적이지도 않으면 뭐랄까 삼삼하니 진짜 끝내주거든요."


지호의 일장연설이 끝날 때까지 멋쩍게 눈빛만 주고받던 수빈과 단비. 지호가 말을 끝낸 이후에도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는 수빈과 달리, 단비는 할 말이 많아보인다.


"그런데... 초면에 이런 말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제가 또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그럼요. 참으면 안 되죠. 무엇이든 물어보십쇼."  

"두 분, 포지션이 어떻게 되세요? 사장과 알바? 아니면 동업?"

"단비야!"


말은 단비가 꺼냈는데 얼굴은 수빈이 붉어졌다.


"아, 괜찮습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죠. 그러니까 저 뒤에 계시는 저분은요. 이곳 마민카 식당의 대표인 이해국 사장님 되시고요... 에... 그리고..."


지호가 해국의 이름을 언급한 시점부터 수빈의 눈동자가 모호해졌다. '이해국의 마민카라... 식당 이름도 주인 이름도 잘 어울려. 무슨 뜻일까?' 이런 생각을 하느라 뒤엣말의 절반은 흘려보내는 중이다.


"그리고 저는... 그러니까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저희 식당의 고문입니다. 이름은 유지호고요. 나이는 스물일곱."


우물쭈물하는 지호의 말을 가로챈 건 해국이다. 어떻게라도 상황을 빨리 매듭짓고 싶어서 나서긴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일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다.


"스물일곱이면 97년생? 저는 99인데, 그럼 우리 넷 다 90년대생인가요?"  

"그렇게 되나요? 나이도 비슷한데 다같이 친구 먹을까요?"

"야! 유지호! 아...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만 비켜드릴게요. 그럼 두 분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가까스로 사태를 종료시킨 해국이 깊은 숨을 몰아쉬는 동안, 지호는 다른 이유로 한숨을 쉬었다.


“에잇, 중요한 타이밍이었는데.”

“오늘도 공복으로 쫓겨나기 싫으면 적당히 해라~”


행여라도 수빈과 단비가 들을까 서로의 귀에 대고 조심스레 속삭이는 두 남자. 뒤에서 보면 꽤나 사이가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동상이몽의 표본이다. 특히 식당 주인으로서의 책임감이 막중한 한 남자는 눈에 띄게 표정이 굳고 있다. 오늘 처음 온 손님들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자책을 떨쳐낼 수가 없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인데 정작 일을 낸 지호는 괘씸할 정도로 천연하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수빈과 단비가 자신이 내어 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있다는 것. 그 모습이 해국의 불편한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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