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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 Aug 05. 2024

컴퓨터 앞에서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


등이 굽어가는 중인 것 같다.

몇 달째 등이 아프다.

추위에 움츠려든 등을 조금 펴볼까 하자,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한여름이 찾아왔고,

일 에어컨 바람에 노출된 나의 등은 점점 더 굽어가고만 있다.



내 등이 컴퓨터를 향해 굽어가기 시작한 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취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취업을 해 '일'을 한다는 건, 여느 드라마 속 미모의 여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고, 고난을 극복하며, 그 안에서 보람도 찾는 멋진 커리우먼의 모습.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만 가르쳤을 뿐.

사실은 직장인이었던 선생님들의 가끔 가다의 볼멘소리 외에는, 직장을 다니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주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대학을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 사는 데 전혀 필요 없는 ‘셰익스피어’ 니 ‘주홍글씨’ 니만 운운하던.

운 좋아 잘 먹고 잘 사는 교수님들 아래에서,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 온 애들'이라는 소리만 들었을 뿐.

기업에 취업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한 턱을 내던 남자 선배들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래도 남자가 가장 큰 스펙’이라는 같지도 않은 소리나 들었을 뿐.



취업을 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속속들이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행동미래학자 윌리엄 하이암(William Higham)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지금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미래에 겪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한 체형의 변화를 토대로 실물 크기의 인형인 ‘엠마’를 만들어 냈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의 사무직 노동자 3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바탕으로 지금의 업무환경 속에 계속 노출될 경우, 20년 후에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를 예측한 ‘미래의 직장동료(the Work Colleague of the Future)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이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낸 인형의 몰골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굽은 등, 거북목, 부은 다리, 불룩 나온 배, 충혈된 눈까지. 바로 괴물의 모습이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의 사무직 노동자들은 하루평균 4시간에서 6시간 이상 앉아서 일을 한다고 하니,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일하는 내 미래의 체형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얼마 전 티브이 속 어린아이가 부모의 직업에 대해 느낀 점을 글로 적어 발표하는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이유인즉슨, 그 아이 왈      


"우리 엄마 아빠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니 참 안 됐습니다. 저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홉 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가 자기 부모님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루 종일 일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부모님이 이야기해 주셔서 일까? 아니면, 사무직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채고 이야기한 것일까?      



나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장인이 되어보고 나서야 알았다.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적립하는 일. 그리고 그만큼(?) 돈으로 보상받는 삶. 컴퓨터 앞에 저당 잡힌 나의 시간이 값으로 매겨지는 직장인의 삶.



아홉 살짜리 아이도 직감적으로 아는 삶. 되고 싶지 않은 모습.



컴퓨터의 모니터를 향해 굽어가는 나의 찌그러진 등은, 그 오랜 시간 전부터 호미와 낫을 들고 밭을 일구던 할머니들의 꼬부라진 등과 그렇게 만난다.       




그날이 머지않았다.

컴퓨터 앞에서 흉측한 꼴로

생을 마감할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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