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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 Sep 23. 2024

병, 리틀 포레스트


   

얼마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다시 봤다. 본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나에겐 흔치 않은 일인데, 넷플릭스가 나에게 맞는 추천 영화로 리틀 포레스트를 권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최근 '파이어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파이어족. 젊은 나이에 일을 하지 않고 은퇴를 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은퇴라. 내 나이 마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 아직. 은퇴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간혹. 회사에 가기 싫어 미치겠었던 적이 있었고, 자주. 내가 왜 이일을 선택해서 하고 있는지 후회하며 살지만. 그래도 은퇴라니. 난 아직 일을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된 애송이에 불과한데. 

라고 생각하기에는 띠동갑이 넘는 후배들과 함께 일하고 있으니 그건 나만의 착각.      

여하튼, 그래도 은퇴라니.      


물려받은 자산 하나 없고, 남들은 다 몇 역씩 벌었다는 서울 하늘 아래 아파트도 없고, 주식도 사기만 하면 마이너스. 코인도 마찬가지. 로또도 매번 꽝. 경제적인 자유가 없는  나에게 은퇴란. 생각지도 못해본 단어.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은 '파이어 족'은 아니다. 임용고시에 떨어진 여자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가 겪는 사계절. 그리고 계절을 겪으며 해 먹는 음식. 농촌마을의 풍경과 음식이 따뜻하게 담겨있는 영화다. 주인공은 나고 자란 농촌마을인 고향에서 치유를 받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는 내용이 주된 스토리다.      


한적한 농촌의 마을. 집 앞 텃밭에 간단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을 하고. 도시에서는 쉽게 사 먹었던 먹거리들을 직접 손으로 해 먹는 삶. 내가 생각하는 '파이어 족'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 영화는 내내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올해는 유독 추위를 타는 내가 춥다는 말을 몇 번 안 하고 넘어간 기이한 겨울이었다. 지난해 12월. 정남향의 따뜻한 집으로 이사를 와서 몸이 따뜻해졌다고만 생각했었다. 올여름은 유독 더웠는데, 남들도 다 유독 덥다고 하니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다. 간혹 어질어질 머리가 핑 도는 일이 있었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살이 좀 빠졌다. 여름에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가 보다 했다.      


세상에. 나에게 질병이 있었을 줄이야.      

'갑상선 기능 항진증'      

나에게 내려진 정확한 병명이었다.      

     

의사는,      

'그 정도로 안 좋았으면 자발적으로 병원에 왔을 텐데요. 건강검진으로 발견했다고요?'     

라고 의아해할 정도로 나의 상태는 심각해져 있었나 보다.      

     


짧았던 직장 생활을 아프다는 핑계로 마감했을 때 내 나이는 28. 그리고 단기 계약직 자리를 잡아 공부를 시작했고, 서른에 두 번째 직장을 잡았다. 이제 마흔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어언 10년.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 나의 사회 초년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어엿한 선임. 파이어족을 꿈꿔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10년을 달려왔으니 몸이 고장 날 것도 당연한데, 스물여덟에는 아프다는 이유로 때려치우고 나왔던 직장인데, 


지금은, 아픈데 직장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간이 쪼그라들 만큼 쪼그라든 나는, 파이어족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쫄보가 되었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아프니 때려치우고 귀농해서 저렇게 살아야 하나를 고민했지만, 

결론은 그렇게는 못 살겠다.로 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영화 속 아름다운 풍경에 폭 빠져 있다가도 농번기 할 일 많은 봄. 땡볕과 들러붙는 벌레들과 사투를 벌이며 밭을 매야 하는 여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치우고 또 치워야 하는 가을과, 제설도 제대로 되지 않을 농촌의 마을 안 길을 걸어야 하는 겨울까지.     


이런저런 핑계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무엇이 나에게 병을 안겨 준 건지 직장의 스트레스, 가족에게서 받은 스트레스, 직장이 없다고, 가족이 없다고 스트레스가 없을까.     


'병'이라는 그럴싸한 핑계에도 '리틀 포레스트'를 선택하지 못하는 나는 정상적으로 나이 먹어 가고 있는 사회인일까. 간이 쪼그라들 만큼 쪼그라든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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