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자영업자 수는 약 600만 명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이제 그 숫자에 속하게 되었다.
엄마의 충격적인 발언이 다시 생각난다.
"나 시골에서 장사할 거야. 고깃집 장사."
장사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도 놀라운데, 요식업에서도 가장 힘들다는 고깃집을 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딸 셋은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았다. 엄마의 도전을 응원하기엔 너무 무리한 시작이었고, 고생길로 간다는 엄마를 말렸다. 하지만 엄마는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우린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고깃집 사장님이 되었다.
먼저 추석쯤이었던 첫 오픈날에 맞춰 나는 미리 내려가 엄마의 장사를 도왔다.(그때 딸 셋 모두 취준생이었다.)
그러다 나는 첫째와 막내를 호출했다. 생각보다 장사가 너무 잘된 것이다. 일손이 부족하고 엄마와 둘이서 일을 하기에는 감당이 되지 않으니 내려와서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곧바로 첫째가 내려왔고 동생도 그다음 날 내려와서 정신없는 오픈 주를 함께 보냈다.
일이 힘들어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도, 그래도 엄마는 자기 가게에서 자기가 사장이 되어 일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자부심과 성취감이 더 컸으면 좋을터인데, 사실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오픈발이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음식 장사에 철저한 준비 없이 진입했기에 모든 게 다 낯설었다. 첫 오픈 때, 손님이 너무 몰려 급하게 많이 샀던 식기들은 다 소용이 없었고, 그건 채소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코로나19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해라 방문자 명단 작성, 사적모임 인원수 제한 등 번거로운 일이 많았다. 10인이 온 손님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데, 욕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19라는 역동의 시기를 버틴 모든 자영업자 사장님들에게 존경을 표현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냈다. 딸 셋은 기존의 거처를 정리하고 내려왔고, 엄마의 일을 함께 운영함과 동시에 취업준비도 해야 했다. 고깃집에서 일을 할 때에는 아르바이트생으로서 맡은 바에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이 생활도 차츰차츰 익숙해졌고,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했다.
벚꽃이 피고 흩날릴 때, 모두가 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 우리 가족의 마음은 요동쳤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벚꽃엔딩과 함께 여름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온 것과 동시에
매출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오픈 주의 엄청난 매출 이후 급격하게 일매출이 하락했지만 그래도 하락한 상태 이후로는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는데, 여름이 되니 매출이 훅 떨어진 것 아닌가. 이건 위험한 신호였다. 급격한 빨간 알림이 우릴 향해 울려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