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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unrong Dec 15. 2024

[상해일지] 외향형 인간(진)

나는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형 인간이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사회에 적응해 가면서 조금씩 나아졌지만, 남들 앞에만 서면 심장 bpm이 빨라지는 건 늘 한결같다.(심장은 거짓말 못 쳐,,) 그래도 보통 외향형 인간이다가 사회생활을 하며 내향형 인간으로 바뀌기 마련인데 나는 반대로 외향형 인간으로 진화 중인 케이스다. 어렸을 때는 남들 앞에서 이름만 불려도 얼굴이 새 빨게 졌다. 아니 대학생 때까지도 줄곧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얼굴이 쉽게 홍당무로 변하지만, 당황했을 때만 그렇지 예전처럼 엄청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얼굴이 빨개지면 또 얼마나 창피한지 전편에 쓴 글처럼 '정직'한 내 몸을 원망하곤 했다.

모임장소는 파티룸이었다!!

그런 내가 이번에 기회가 되어 한중 언어교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하루 종일 노는 모임이었다. 이야기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밥도 먹고 하는 그런 일반적인 모임, 하지만 이런 활동자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괜히 긴장이 됐다. 심지어 열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는 갈지 말지 정말 20번은 고민했던 것 같다. MBTI I에게는 5명이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최대치 인원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았잖아'하며 스스로를 응원하고 또 응원하면서 모임 장소로 향했다.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들과 모임을 하면 항상 1등으로 도착했는데, 중국에서도 역시 1등이었다. 차라리 사람이 많았으면 덜 뻘쭘할 텐데, 한 명 한 명 올 때마다 반겨줘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도망칠까 그냥??


긴장해서 인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1분도 안 돼서 다 마셔버렸고(평소에는 그래도 2분 정도 걸린다.), 가만히 있기 뭐 해 아이스크림을 추가로 주문했다. 그때부터 한 명씩 멤버들이 오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가장 큰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모르겠다는 것' 어떻게 할 줄 몰라 뻘쭘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제 무언가라도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TV에서 예비 우주인들이 중력을 버티는 실험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아서 다행.


'한국인이세요?' 


이 한마디 물음은 정말 많고 많은 생각을 거쳐 내뱉은 말이다. 한중 교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중국인이 들었을 때 어쩌면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을 것 같았고, 한국인이라면 참 다행이니 말이다.


'아~ 중국에는 공부하러 오셨어요?'


'직장인이세요?'


'혹시 MBTI,,,,,,,,?' (MBTI로 사람 판별하는 것을 떠나 이렇게 아이스 브레이킹 하게 만들어 줬다는 점에서 서 MBTI 연구진에게는 항상 감사할 따름이다.)


와 같은 부류의 질문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래도 어느 정도 호구조사를 하고 나니 조금씩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놀라웠다. '이야 나 정말 발전했구나! 이제 외향인이라고 해도 되겠어,,,,는 오바겠지?' 정도. 어느새 사람들이 열 명 정도 모여들었고, 바로 보드게임이 시작됐다. 아니 아무런 소개도 없이 이렇게 노는 거였구나. 진짜 참신했다. 원래 이런 건지도 모르다 보니 다른 분들의 호칭을 부르기가 어려워(아직도 소개해 주신 분 말고는 한 분도 이름을 알지 못한다) 앞에 놓인 카드 번호로 부르곤 했다.


'5번 님 게임 잘하신다~'


'저는 8번 님이 마피아 같아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보드게임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반 정도 지난 무렵 영혼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비축하고 비축해서 왔지만, 알파벳 앞자리가 E인 사람들 앞에서 그대로 모든 기가 빠져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무렵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직아 좀만 참아다오.. 제발.' 


중국 노래방(시설도 별로고 가격도 진짜 비싸다, 미국 뺨치는 정도!)

꼬르륵 소리가 혹여나 들릴까 봐 숨을 멈추곤 했다. 아! 숨을 멈춘다고 해서 꼬르륵 소리가 안 나는지는 잘 모른다. 그냥 생존 본능이랄까?


그렇게 보드게임이 끝나고는 같이 밥도 먹고 노래방까지 갔다.(모든 남아있는 영혼을 짜내 쏟아냈다.) 보드게임 이후를 한 줄로 표현할 만큼 그때의 영혼, 기억은 크게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나 자신 너무 칭찬한다. 이제 어디 가서 내향적이라는 말을 조금 줄여봐도 되겠다.


오늘부터 나는 외향형 인간(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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