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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Mar 01. 2024

나비 모티프와  ⟨큐피드와 프시케⟩

나비 모티프와  ⟨큐피드와 프시케⟩

팀 버튼은 민담을 “삶에 대한, 즉 헤쳐 나가야 할 삶에 대한 일종의 극단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상징주의 미학을 잘 형상화한 것이 ⟪유령신부⟫에 들어 있는 나비 모티프이다.


⟪유령신부⟫에서 나비는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 영화는 스케치북에 나비 그림을 그리는 빅터의 손길을 자세히 보여준다. 나비 그림을 끝마친 빅터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 창가에 놓아 둔 유리 용기에 갇힌 나비를 자유롭게 풀어 놓아준다. 또한, 영화 중간 쯤 빅터와 에밀리가 지하 세계에서 지상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숲속에 나비가 다시 나타나서 두 사람의 눈길을 모은다. 에밀리는 보름달이 있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 마신다.


에밀리가 수많은 나비로 변신해서 보름달을 향해 날아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유령신부⟫의 하이라이트이다. 괴물 영화의 계보를 이으려는 팀 버튼의 야심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팀 버튼은 레이 해리하우젠의 괴물 캐릭터들이 죽는 장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1]


그 [레이 해리하우젠]가 만들어낸 괴물은 영화 속의 어떤 배우들보다 개성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그 괴물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어요. 괴물들이 죽는 장면이 항상 아름답고 비극적이었지요. 마지막으로 꼬리를 한 번 뒤튼다든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는 그런 장면 말입니다.  그분은 작품에 그러한 열정을 불어 넣었고, 제가 보기에는, 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애니메이터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유령신부⟫에서 에밀리는, 해리하우젠의 괴물처럼, ‘아름답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결혼식을 올리려던 에밀리는 빅터가 다른 여인의 신랑임을 깨닫고 결혼 반지를 빼서 그에게 건네주고 부케를 뒤로 던진 후 홀로 교회를 떠난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밤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 쉰 뒤에 몸이 해체되어 수많은 나비로 변해서 승천하는 에밀리의 최후는 관객의 뇌리에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유령신부⟫의 처음과 끝은 나비 모티프를 중심으로  포(Poe)의 ⟨단일한 효과⟩ 이론에 잘 부합되도록 구성되었다.

나비가 ⟪유령신부⟫의 처음과 끝에 비중있게 등장하는 만큼, 나비가 지닌 상징성은 매우 중요하다. 국내 학자 가운데는 ⟪유령신부⟫에 등장하는 나비를 불교의 윤회사상과 장자의 ‘호접지몽’(193)과 관련 짓기도 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비약이 아닐까 싶다.[2]  ⟪유령신부⟫에 등장하는 나비는 동양적인 상징물이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상징물로 파악해야 한다. 나비는 유충, 번데기, 성충의 단계를 거친다는 생물학적인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영혼, 죽음, 재생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상징물로 인식되어 왔다.[3]


멕시코 원주민인 아즈텍은 나비를 죽어가는 사람이 내쉬는 숨결 또는 영혼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였다. 멕시코인들에게 나비는 “지하 세계를 지나가는 태양으로서, 희생과 죽음, 부활”을 상징한다.[4] 우리나라의 ⟨아랑 전설⟩이나 중국의 ⟨양산백과 축영대⟩ 전설에서도 주인공들은 죽어서 나비로 환생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도 나비를 영혼의 상징물로 생각하였다. 영혼을 뜻하는 프시케(Psyche) 라는 단어에는 나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신체를 떠날 때 나비로 변신한다고 믿었다. 폼페이 벽화에서 저승을 다녀 온 프시케를 나비 날개를 지닌 소녀로 묘사한 것도 나비를 죽음에서 부활한 존재로 여겨서이다.  


동서양의 옛사람들만이 나비를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수용소 벽에 환생을 상징하는 수많은 나비를 그려 놓았다.[5] 이러한 나비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퀴블러 로스는 ⟪사후생⟫에서 나비의 상징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6].


 “죽어가는 어린이들과 나눈 대화와 그 말들을 이해한다면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은 나비가 고치에서 벗어날 때의 현상과 똑같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몸은 고치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 몸은 오직 잠시 살기 위한 집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참 자아는 아니다. 상징적으로 비유하자면 죽음은 그저 ‘한 집에서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고치가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면 나비가 태어난다.”


⟪유령신부⟫에서 에밀리가 나비로 환생하는 마지막 장면은 퀴블러 로스가 언급한 고치와 나비의 비유에 잘 부합된다. 시체 신부 에밀리의 몸은 구더기 매곳(Maggot)이 눈과 귀에 살 수 있을 정도로 썩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빅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매곳과 결별한 에밀리는 썩어가는 몸을 해체해서 수많은 나비로 다시 태어나서 하늘로 올라간다.


⟪유령신부⟫에서 빅터와 에밀리의 공간 이동도 ⟨큐피드와 프시케⟩ 이야기와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빅터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지하계를 다녀와서 연인과 결합했다는 점에서 프시케와 유사하다. 에밀리도 지하계에서 지상으로 돌아온 후 다시 천상계로 올라간다는 점이 프시케를 떠올리게 한다. 프시케와 비슷한 속성을 지닌 빅터와 에밀리는 서로 다른 두 존재라기 보다는 한 존재의 두 얼굴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분석심리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가족과 종교의 억압에 시달리면서 절망에 빠져 있던 빅터의 눈앞에 갑자기 땅속에서 에밀리가 출현한 것은 빅터가 무의식에서 아니마를 불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와 빅터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나비는 ⟨큐피드와 프시케⟩ 그림 속의 나비를 연상시킨다.  오른편 그림은 프랑수아 제라르의  ⟨프시케와 아모르⟩ 그림의 부분도이다.

빅터가 유리 용기에 갇힌 나비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첫 장면은 이중적인 상징성을 지닌 듯싶다. 지하계에 갇힌 에밀리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상징적 표현이면서 또한 빅터의 심층 심리에 내재하여 있던 아니마를 의식화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 같다. 에밀리는 춤과 노래를 즐기는 생기발랄한 품성을 지녔고 ‘사랑의 도주’를 겁 없이 감행할 정도로 무모하고 열정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모습의 에밀리는 권위주의가 팽배한 사회에 짓눌려 살았던 빅터가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은 ‘내적 인격’인 아니마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의 손에 이끌려서 지하계에 온 빅터는 다채로운 사건을 체험하고 망자들과 친해지면서, 점차로 자기 삶에 적극적이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에밀리가 자유로운 나비로 다시 탄생하였듯이, 빅터도 에밀리와의 만남을 통해 낡은 고치를 벗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 Woods, Paul A, ed. Tim Burton: A Children’s Garden of Nightmares. London: Plexus, 2007, 184.

[2] 김효일, ⟨장편 애니메이션 '유령신부’에서 나타난 신화적 수사법 연구⟩, ⟪디지털디자인연구⟫ 6집 2호, 2006년.

[3] 나비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다음 책 참조. Chevalier and Gheerbrant. Dictionary of Symbols. Trans. John Buchanan-Brown. London: Penguin Books, 1996.

[4] ⟪한국문화상징사전⟫, 동아출판사 1992, 145면.

[5]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류시화 번역,  ⟪인생수업⟫ 도서출판 이레 2006, 13면.

[6]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최준식 옮김, ⟪사후생: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대화문화아카데미, 1996, 17~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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