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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27. 2023

버뮤다 삼각지대

캘리포니아 그녀 29화

87


김선미는 오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게으른 햇살 탓인지 캠퍼스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학생회관 4층 문창반 창가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장욱진과 김용덕은 티테이블에 앉아 문창 일지를 뒤적였다. 비행기는 겨우 가까스로 학생회관 영공을 벗어나는 듯하다가 영락없이 체육관 지붕 위로 불시착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비행기는 상승기류를 이용하는 독수리가 아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후배가 들어왔다.


"누구세요?"


잘못 들어온 남의 동아리처럼 처음엔 엉거주춤 걸음을 멈추고 낯설어하다가 눈에 익은 실내 풍경에 힘을 받아 물어보는 후배를 향해 장욱진은 말없이 그저 웃었다. 화염병이 병정처럼 줄지어 돌격 명령을 기다리던 캐비닛 안에는 세계문학 전집과 노벨문학상 받은 외국 소설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이방인처럼 뻘쭘하게 자리 차지하고 있는 화려하고 두꺼운 책들도 있었다. 엑셀 쉽게 배우기, 중급 프로그래밍 언어, 직장생활 이렇게 하라, 따위의 책들이다. 마지막 비행기를 허공에 힘껏 던졌다.


"순직 선배세요?"


비행기는 기상 상태 때문에 제풀에 기가 죽어 학생회관 영공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토요일인데 어쩐 일이야?"


나는 그제야 후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국문과 후배라 얼굴 익은 터였다. 후배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 전설의 삼총사 맞죠?"


"전설은 무슨…, 개뿔도 아니야."


장욱진은 후배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문창 일지 갈피를 넘겼다. 얼굴 마주하며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고민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시대적 감성이 점점이 박혀있던 예전의 문창 일지가 아니었다. 소비자로서 강의 내용과 형식을 품평하거나 후한 학점을 받기 위한 노하우 등이 질서 없이 늘어서 있는가 하면 소문을 만들어 내는 위험한 문장들도 더러 있었다.


"뒤포 너머 고등학교까지 비행기 날렸다는 얘기는 전설입니다. 요즘은 아예 비행기를 날리지도 않지만."


후배는 한껏 상기된 표정이지만 장욱진과 김용덕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이질감을 숨길 수 없었다. 기억할 수 없는 까마득한 날부터 시간은 움직이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다.


"최루 가스를 뚫고 날아가는 비행기는 이젠 없어."


장욱진은 심드렁하게 말하곤 잠시 멍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항하고 항거하지 않는 젊음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저마다 놓인 처지에 익숙해지려는 행태에 핀잔마저 아깝다는 허탈함이 멍한 표정 뒤에 숨겨져 있었다. 그랬다. 시간은 언제나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뒤 다시 문이 열리고 김선미가 들어왔다.


"선미 선배, 연극 정말 잘 봤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후배는 김선미를 보며 이미 어긋나기 시작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옥타브 높게 말했다.


"그래? 재미있었어?"


"팸플릿 봐도 선배는 없던데요?"


"스텝이니까 배우처럼 사진이 있는 건 아냐. 그냥 작게 이름만…."


"선배 덕분에 눈 호강도 하고 여친한테 점수 좀 땄어요."


"다행이네."


장욱진과 김용덕은 이윽고 문창 일지를 티테이블 한쪽으로 밀쳐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습관처럼 장욱진과 김용덕은 종이비행기를 접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조금씩 비행기는 제 모습을 갖춰가고 침묵이 무거운 모양이었던지 후배는 캐비닛에서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엑셀 쉽게 배우기였다.


"가방이 무거워 여기 두고 다니거든요. 도서관에 가봐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고개 짧게 숙이다가 뒤돌아 문 열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다지 친하지 않으면 아무리 선배라고 할지라도 어색하고 이유 없이 주눅 드는 듯한 기분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연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욕감 비슷한 감정은 유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후배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귀국 보고라도 해야 하지 않냐?"


장욱진은 핀잔하듯 말했다.


"아님, 무용담이라도."


"언니는 만났어요? 잘 지낸대요?"


호기심과 궁금함이 뒤엉킨 눈빛으로 김용덕을 바라보았다. 멋대로 해석하거나 자기 편한 데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편지와 다른 목격담을 듣고 싶은 욕구는 당연했다. 김용덕은 접은 종이비행기 날개를 손가락으로 몇 번 튕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비행기를 쓰다듬듯 매만지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볼펜 집어 들어 무적 해병 막강 해병을 양쪽 날개에 하나씩 썼다. 쥐불놀이하듯 팔을 크게 돌렸다. 손가락에 달라붙은 비행기는 풍차처럼 돌았다. 순식간에 비행기는 학생회관 영공을 날고 있었다.


88


버뮤다 삼각지대인 체육관 영공을 가볍게 선회 비행하면서 느슨한 햇살 속에서 반짝거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뒤포 상공에서 골짜기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날개 꺾이고 사정없이 곤두박이칠 쳤다, 추락했다. 김용덕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겨우 이틀이지만 좀 충격적이었어."


"왜? 편지처럼 살지 않아?"


"생활에 쪼들리는구나?"


김용덕은 다시 비행기를 접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구름 몇 개가 지나가고 있었다.


"궁핍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일단 전혀 꾸미지 않아. 썩어도 준치라는데 메이퀸 출신이잖아? 선머슴 같다니까. 옷도 그렇고. 처음엔 몰라봤어. 웬 동양 여자이거니 했다니까."


비행기 접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살기 바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여자는 무조건 예쁘게 꾸며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문제야. 언니는 원래 그런 것에 무관심했잖아? 메이퀸 때야 어쩔 수 없이 꾸몄던 거고."


"그런 느낌이 아니야. 아무리 꾸미더라도 눈빛은? 얼굴이야 덕지덕지 화장품 처바를 수 있지만 마음은?"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냐?"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떠다니는 바오바브나무 같다고 할까? 뿌리를 송두리째 드러내는."


"경계인이란 말이군."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캘리포니아잖아?"


비행기 동체가 완성되고 이윽고 날개가 만들어졌다. 사인펜을 집어 들었다, 무적 해병 막강 해병.


"편지에선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작은 행동도 느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 경계인? 그건 관념이야. 관념은 추상적이지. 다시 말해 실체가 없는 생각 덩어리란 말이야."


비행기 날개의 각도가 중요했다. 얼마나 펴져 있느냐, 혹은 접혀 있느냐에 따라 양력이 달라졌다.


"그래서?"


"나야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데도 경계인이었던 거 같아, 지금 돌아보면. 만났던 사람 모두 물어봐. 남쪽이냐 북쪽이냐? 어느 쪽에서 왔냐? 밖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들 하는데 실은 모두 경계인이 되는 거야. 늘봄식당 알지?"


"양강도 혜산에서 왔다는?"


"김철수란 놈 있잖아? 안경 끼고 얼굴은 허여멀겋더라. 어딜 봐서 혜산에서 왔다고 할 수 있을까? 나랑 비슷해. 하지만 싸웠어. 주먹 쥐고 치고받고 그런 건 아니고 말싸움. 고난의 행군 세대가 군인이 되었잖아? 인민군. 비실비실해서 통일할 수 있겠냐고 빈정거렸지. 녀석 얘기는 결국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인 것들이 중요하다는 건데 따져보면 경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주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잖아?"


"어렵다!"


김선미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생각이나 판단을 자기중심적으로 하는 건 거의 본능에 가까우니까. 오죽하면 자기가 죽으면 세상도 죽는 거라고 믿겠어?"


장욱진도 비행기를 접기 시작했다. 손가락 몇 번 쓱쓱 움직이더니 이내 완성했다, 콩코드 여객기를 닮았다.

"말싸움할 때는 지기 싫어서 우격다짐도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멜라니가 한심스럽게 봤을 게 분명해. 니들은 다 똑같은 놈들인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니 그보다 더한 코미디가 어디 있냐고 해도 할 말이 없잖아? 맞아. 무적 해병 막강 해병은 북쪽을 향한 것이 아니야. 우리를 위한 것이지, 김철수도 포함하는."


김용덕은 두 번째 비행기를 접기 시작했다.


"미국물 며칠 먹더니 갑자기 이상주의자가 됐네? 좀 웃긴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데 형은 왜 그래?"


김선미가 장욱진에게 눈 흘겼다. 창밖에 구름 몇 개가 지나가고 시간은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은 사실이잖아? 핵은 말이야… 한 방이면 끝장이라구. 너 죽고 나 죽자는 거야. 막 가는 거지."


"그건 그렇지만…."


"어느 부대든 고문관 한 명씩 있잖아? 군 생활해봤으니까 다들 알 거 아니야? 얼마나 골치 아프냐? 걸핏하면 민폐 끼치잖아? 이상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장욱진은 손을 한껏 공중으로 뻗어 날렵한 비행기로 실내 모의비행을 했다. 비행기는 미사일처럼 바닥에 순식간에 내리꽂혔다.


"사진전에도 가봤는데 확실히 캘리포니아 그녀는 경계인이었어. 늘봄식당과 문화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정작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래서 땅을 갖지 못한 나무뿌리란 거냐?"


"말하자면."


김용덕은 두 번째 비행기 날개에도 주술 같은 글씨를 썼다, 무적 해병 막강 해병.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명준 이후로 우리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건데 팔팔 올림픽은 뭐고 경제적 위상은 뭐냐? 국제기구 수장이 된 것은?"


장욱진은 추락한 비행기를 집어 들었다. 사정없이 짜부라진 대가리를 꾹꾹 눌러 바로 고치기 시작했다.


"본질에 충실해야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조리 경계인이야. 그걸 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팔팔 올림픽이고 지디피야. 난 그렇게 생각해."


"사람 변하는 거 순식간이네? 손바닥 뒤집듯 또 변할걸?"


장욱진은 비아냥거렸다, 습작 토론을 방불케 했다.


"넌 왜 입 다물고 있냐? 중간이라도 하려고 그러냐?"


장욱진은 나를 쏘아보았다.


"뭐, 그것도 경험이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고 생각이지. 강요할 것은 못 되고 스스로 판단해야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너무나 경직된 이념 과잉의 사회라는 건 사실이지, 캘리포니아 그녀 말처럼. 그리고 모든 토론은 언제나 항상 결론이 없잖아?"


"하긴…, 그런데 형은 일기 받았다며? 언제 돌려줄 거냐고 나한테 연락 왔었어."


김선미가 뒤늦게 생각난 모양인지 얼굴색까지 바꿔가며 채권자처럼 말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몇 개가 여전히 또 지나가고 시간은 서둘러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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