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순직 Apr 27. 2024

여기, 슬럼프는 살아있다

두 달 가까이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생업 없이 마른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게으른 늘보처럼 눈만 껌벅거렸다. 부지런한 초침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무엇보다 부럽지만, 선택이라는 위장막을 뒤집어쓴 운명이라 여겼다. 어쨌든, 첫 문장을 이끌고 갈 배짱이 없었다. 엎어놓거나 삐딱하게 비스듬히 보아도 도무지 아닌 것 같아, 이내 지워버리자 동시에 지워지는 머릿속을 망연히 이리저리 흔들었다.


<임신했어, 결혼해>와 <재수 없게 임신했어. 결혼해>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두 문장의 차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쓰는 사람의 관점에서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라든가 사소한 사건들의 축적, 혹은 독자가 예상하지 못하는 반전을 위한 치밀한 복선 따위들이 문제가 아니다. 딱히 꼬집을 수 없으나, 문장이 마음에 닿지 않았다. 며칠을 전전긍긍하다가 <일 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하나가 말했다>라고 두 번째 문장을 쓰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판단은 둘째치고, 역시나 문장이 엉터리다. 적확하게 말해서 문장이 만들어 내는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겨우 두 문장을 가지고 상상력이 어쩌고저쩌고 투정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지만, 작은 틈은 이내 구멍이 되고 삽시간에 둑이 무너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말아먹은 글이 어디 한두 개인가.


문장부터 구조나 인물 등 필요한 모든 구성요소를 싹 다 새롭게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도 머리가 받쳐 주지 않았다. 아니다. 머리로 삶을 살 수 없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했다. 첫사랑을 만나는 것보다 심장은 더욱 날뛰어야 했다. 하여 세상이 거침없이 요동쳐야 했다. 절망과 슬픔과 쓸쓸함과, 이윽고 오랫동안 마음 저 밑바닥에 남아 있는 고통 역시 밑거름이어야 했다. 거대한 땔감이 되어서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야 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다. 누군들 눈물 젖은 글을 짓지 않으랴!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진수는 하나를 힐끗 쏘아보았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사춘기도 아니고, 뜬금없이 생뚱맞은 개소리를 짖어대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균열이 생겼다. 앞 문장에 비해 밀도가 갑자기 확 꺾였다. 틈이 구멍으로 진화한 셈이다. 글 전체의 윤곽이 어렴풋한 상태에서 문장을 이어가니, 십중팔구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다. 설계 도면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짓는다고 해도 기둥의 철근을 잃어버린 순살 아파트가 왕왕 있듯이 글짓기도 마찬가지다. 글은 쓴다고 써지지 않는다. 마음을 단단히 채비하고, 묘사할 지점과 설명할 부분이 앞 문장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몸과 마음은 여전히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글은 현실에서 한 발 비껴서 있다. 그 간격을 좁히려고 지랄발광하지만, 어림없는 개수작이다.


현실은 누구에게나 삼시세끼와 관리비에, 아이들 걱정까지 덧붙여져 영락없이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곽이다. 그 안에 갇혀 아득바득 살아내는 일이 어찌 만만하겠는가. 발바닥에 거머리보다 더 악착같이 달라붙은 그림자를 떼어낼 수 없듯이 제아무리 용을 써도 현실은 꼼짝하지 않는다. 오랜 기억이라 무의식 속에서 어디까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안타까운 이야기가 떠오른다. 후배로 편입한 녀석은 말수도 적고 나대지도 않아 눈에 띄지 않았다. 나 역시 경험으로 타인을 규정하는 탓에 얌전한 녀석으로 판단했다. 딱히 눈길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상한 소문을 들었다. 녀석의 아버지가 안기부에 끌려가 반죽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그날부터 엉망으로 취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리고 미친 듯이 시를 써냈다고 했다. 반년 가까이, 어쩌면 한 달 남짓일지도 모른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아래였다. 꼬마인 녀석은 아버지의 시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 눈앞의 현실은 시보다 냉혹했다. 취기와 시 속에서 하루씩 연명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현실 앞에서 시는 얼마나 무기력했을까. 녀석은 아버지의 상실을 몸으로 견뎌냈다. 녀석은 시를 전공했다.      


“재수 없게, 임신했어. 결혼해.”

일 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하나가 말했다.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진수는 하나를 힐끗 쏘아보았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사춘기도 아니고, 만나자마자 뜬금없이 생뚱맞은 헛소리를 짖어대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미 끝난 얘기잖아?”

“혼자서 끝내?”

하나는 느긋했고, 진수는 곤혹스러웠다. 결혼은 무슨,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투덜거리면서 뻗대면 당장은 넘어가겠지만, 뒤탈이 문제였다. 직장을 옮기기 전에 육 개월가량 동거한 사실이 꼬투리가 될 수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견고한 현실을 돌파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뼛속까지 스며든 악랄한 고문의 고통을 악물면서 시를 써냈던 녀석의 아버지만큼 절실할까. 자신감에 대한 의혹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게으름으로 위장한 감이 마음 안쪽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두 달 가까이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길고 지루한 침묵 시작었다. 하루치의 태양은 변함없이 떠올랐고, 밤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하나와 진수의 어긋남은 머릿속에서만 맴돌았고, 문장은 일출 뒤 안개처럼 낱낱이 흩어졌다.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마음 밖에서 쭈뼛거렸고, 문장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안에서 얼마나 더 삭혀야 하나. 바닥은 어디쯤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책장에서 꺼냈다. 읽으면서 문장을 쫓아가지 않고, 1987년에서 1989년 사이의 쿤데라를 떠올렸다. 망명지 프랑스의 낯선 공기를 마시며 책상에 앉아 만년필을 백지 옆에 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그가 낯설지 않았다. 낮이었든 밤이든 상관없다. 써야 할 글 앞에서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을 존재하게 하려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영감을 붙잡기 위해 많은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한 문장씩 써 내려갔을 터. 그 철저한 고독과 침묵에 몸서리쳐진다. 이야기에 독자의 취향만 얹어놓으려고 골몰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거리에 나서면 숱하게 밟히는 사람들의 발자국만큼이나 이야기는 널려 있는데, 그들을 뒤쫓기만 한 것은 아닐까. 소설이 이야기로 전락한 현실에 부응하기 위해 까치발을 곧추세우지 않았나? <생각을 존재하게 하려는> 피눈물도 없이.


슬럼프는 살아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해 가을은 겨울이었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