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낙서인간 Mar 23. 2022

관계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만능 스포츠맨'인 H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생 때와 거의 다름없는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탈모의 낌새조차 찾을 수 없는, 열대 밀림 같은 무성한 모발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법 전문 변호사인 그는 로펌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했는데, 

수(數)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 일처리 스타일 때문인지 

확고한 클라이언트를 두고 대단히 안정된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H의 삶을 동경했던 이유 중에는 그의 이성관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중학교 때 다니던 교회 성경학교의 같은 반 친구와 결혼했다 갈라선 이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전 부인이 키우는 것으로 원만하게 합의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여성들과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여자 친구 명단은 배우, 가수, 모델뿐 아니라 기업인, 운동선수, 의사, 법조인, 정치인 등 

실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H가 유명인사들만 이성 친구로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H의 저녁 자리에 몇 번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여성 중 한 명은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J라는 이름이었는데, 흔히 가정주부 앞에 붙이는 '평범하다'는 말은 

그녀 앞에서는 너무나도 부적절한 수식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우아하고 기품 있으면서도 뇌쇄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마치 H가 엄청난 바람둥이나 호색한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는 '구식 젠틀맨'에 가까운 녀석이었습니다. 

H는 상식과 유머가 풍부했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친구를 만날 때 대화를 주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듣고 '아!' 또는 '음...' 하는 반응을 적절히 내놓곤 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H의 여자들'이라고 불렀지만 그가 여성 친구를 대하는 태도는 

애인이라기보다는 '매우 중요한 고객의 따님이나 부인'을 대하는 것과 유사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친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과연 H가 수많은 여자 친구들과 어느 정도 수준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친구들의 이 같은 궁금증에 대한 H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진정한 신사는 세금과 사귀는 여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법이지."


이 말은 어떤 소설에 나오는 문장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는데, 

우리는 H란 인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대사라며 

술자리의 안주 거리로 곧잘 인용하고는 했습니다.  


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H가 가끔 심각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둘이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관악산 등산 후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던 그날이 그랬습니다.


"인간에게서 사회적 관계를 다 배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사회적 관계?"

"요컨대 직업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학벌이라든지 그런 거를 다 벗겨내면 

H라는 인간에게 뭐가 남느냐는 거지."    

"글쎄, 네 몸뚱이랑 네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만 남겠지."

H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는데 우리가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 놈들이 군인, 민간인 가릴 것 없이 여차하면 다 처형시켜 버리는 악질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살아남을까? 아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클 거야. 

기업 사정을 잘 아는 세법 변호사라는 게 놈들에게 꽤 쓸모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내 자식도 죽고 내 친구들도 다들 죽어가는 상황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란 인간은 무엇으로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까."

"참, 걱정도 많다. 넌 그게 고민이냐?"

"응, 난 요즘 이게 제일 고민이야. 

나란 인간은 무슨 의미를 가진 존재일까. 

내 삶은 뭔가. 

인간관계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는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술자리 이후 H와는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1년 반쯤 지났을 무렵, H가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위암이었고 이미 다른 장기로 상당히 퍼진 상태라고 했습니다. 


입원한 병원을 급히 수소문해서 찾아가 보니 이미 생명은 그를 떠나는 중이었습니다. 

몸무게가 40킬로그램 이하로 떨어져 미라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H에게는 대화를 나눌 힘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입원실은 H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L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H만큼이나 점잖고 성실한 친구였는데, 말이 사무장이지 사실상 H의 개인 비서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6개월 전쯤 암이 발견됐는데, 변호사님이 적극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항암 치료도 거부하시고."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나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은 어렵지만 항암치료를 하면 희망이 있다고 했는데,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잘 모르겠습니다만, 삶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H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L은 잠시 주저했습니다.

"선생님이 아마도 가장 가까운 친구이실 테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변호사님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정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고객으로 만나서 알고 지낸 지는 10년 가까이 됐고 진지하게 교제한 지는 4년 정도 됐는데 

재작년쯤 그분이 돌연 연락을 끊었습니다. 

'남편에게 돌아갔겠거니'하고 낙담하고 계셨는데, 

한참이 지나서 알고 보니 도박에 빠져서 집안 재산을 다 거덜내고 

이혼당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변호사님이 이 사실을 알고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썼는데 

끝내 거부하고 외국으로 피신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분이 도박에 빠진 이유가 어떤 건달 때문이었습니다. 

남편과 생활하고 변호사님과 사귀면서 동시에 건달과 놀아나고 있었던 거죠. 

해외로 도피할 때도 그 녀석과 함께였던 것 같습니다."

"혹시 그 여자분이 J 아닌가요?"

"아시는군요."
"그런데 그게 항암치료를 거부할 이유가 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삶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너무나 강하게 치료를 거부하셨으니까요. 

솔직히 암이 발병한 것도 J 그분과의 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달 후에 H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원인은 암으로 기록되겠지만 그가 생명을 버린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직업, 명성, 재력, 인간관계... 이런 사회적 관계를 벗어버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는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독립기관]에, 제 경험을 각색하여 만든 이야기입니다.


신수정作 제목: Artist's palette   55 x41cm, Gouache on paper (2019)


 


이전 04화 집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