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스플레인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줄여서 splain 이라고도 쓰입니다. 2010년에 뉴욕타임스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고 2014년도에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됐습니다. 아직 이 단어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단어로 대개 남자가 여자 앞에서 아는 척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설명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는 저처럼 말이죠.
제 경험으로 봤을 때, 40대가 넘어가면서 남성들은 이 맨스플레인의 함정에 빠질 확률이 90%가 넘습니다. 자신이 잘 아는 대화 주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진중하게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둘러서 표현하는 태도를 지닌 중년 한국 남성을 만나기란 겸손한 부자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아는 척하는 태도는 대화 상대가 여성일 경우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브라질의 엘리트 고위 장교를 만난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자마자,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브라질 정치 경제의 현실과 문제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아는 척하는 사람과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가 늘어놓는 브라질 이야기의 대부분은 무지와 편견에 오염된 것 투성이었는데, 민망함과 부끄러움은 온전히 일행인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중년 아저씨들의 이런 지적 허영심이 치솟는 상황은, 그가 대화 주제와 관련한 책을 '한 권' 읽거나 TV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보았을 때 극에 달합니다. 그는 책이나 TV에서 얻은 지식과 시각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싶은 허영심에 휩싸인 나머지 일종의 광기에 빠지기까지 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거나 이의 제기라도 할라치면 진리의 투사라도 된 양 핏대를 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회에 가 보면 이런 어설픈 '자기 확신형' 인간을 여럿 만날 수 있죠.
자기 확신에 넘치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모든 행동에 확실하게 뛰어든다. 그는 이 세계를 명약관화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자기 확신형 인간은 종종 강요적 인간형이 되기도 한다. 그는 충동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나머지 세상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자기 이상에 맞춰 세상을 정렬하는데 골몰한다. 이런 사람은 확신이 자신의 장점이라 믿는다. 그런 헛된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람은 대개 자신감의 어두운 기원을 감추고 있다. 계획들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경우에도 이들은 종종 실패한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 자기 이상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 나머지 현실에 대응조차 하지 못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대화 주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여러 책을 읽었다면 그의 태도는 훨씬 신중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를 해왔다면, 그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할 뿐 쉽사리 자신의 견해를 주입하려 한다거나 옳고 그름을 단언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허영심은 우리 마음의 약점 곳곳을 파고듭니다. 허영심의 가장 큰 무기는 '비교'입니다. 일단 비교하기 시작하면 허영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비교를 강요합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메신저를 통해 타인의 일상에 대한-과장되고 왜곡된-정보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웃의 차가 내 차보다 더 좋은가? 내 아들은 내 친구 아들보다 더 똑똑한가? 우리 집 소득과 사촌네 소득은 어디가 더 많은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말처럼,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입니다.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진 것을 뽐내고 싶을 때, 타인과 비교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괴로울 때, 허영심의 유혹에 넘어가 분별을 잃고 불행한 기분이 들 때 찾아보는 글귀가 있습니다. 시간의 힘에 관한 글입니다.
앞으로 1억 년 후 미래에 바다의 상당 부분이 지구 맨틀 속으로 가라앉고, 대기에 이산화탄소가 충분치 않아 식물이 살 수 없어지고 지표면은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바위 사막이 된다면, 지구에 온 외계의 지질학자는 우리 문명의 증거를 무엇으로 알아낼 것인가? 지하 1미터 아래, 바위에 새겨진 두껍고 진한 선 하나가 우리 앞에 왔던 모두와 우리를 구분해줄 것이다. 15센티미터 두께의 거무스름한 층에 우리 도시와 자동차와 도로와 다리와 무기들이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이전의 지질학 기록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온갖 종류의 화합물들 또한 함께. 콘크리트와 벽돌은 석회암만큼 쉽게 풍화되고, 가장 단단한 강철조차 쇳녹으로 바스러질 것이다. 좀 더 면밀하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우리가 엄청난 가축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단조로운 목초지를 일궜고, 거기에서 나온 꽃가루가 다른 종류를 압도할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그 지질학자는 화석화된 뼈를, 잘하면 우리 뼈를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류를 포함한 야생동물의 뼈를 다 모아도 양과 소를 합친 중량의 십 분의 일에도 못 미칠 것이다. 외계 지질학자는 결국 생물 다양성이 이미 줄어들고 있는 지금이 대멸종의 시발점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언 매큐언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누가 더 잘났는지' 따위는 고민의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 그림 설명: 남해의 가천 다랭이마을을 종이에 과슈로 그려보았습니다. 저희가 방문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어 관광객이 거의 없었는데요. 고즈넉한 바닷가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마을 분들이 고령화되면서 농사 지을 사람이 크게 줄고 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유산이 사라진다면 참 씁쓸할 것 같습니다. 다랭이 마을 주변 식당에서 먹었던 멸치 쌈밥이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