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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현 Apr 10. 2024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생기는 죄책감

나는 모든 형태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효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효도.. 효도란 뭘까? 나는 경제적인 부분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걸 왜 내가 해야 되냐는 생각으로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


망령이고, 유령이지 않나?라는 생각. 유령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본인이 살아있을 때는 뭐하고 살아있는 사람, 남의 시간 귀한 줄 모르고 자기 한을 풀어달라고 하는건데? 아마 귀신이 있다면 살았을 때, 뭔가를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너무 강하게 든다. 자기 인생에 책임감이 없었고 등등.


빌 게이츠도 이런 말을 했다. 태어나서 가난한 건 자기 탓이 아니지만, 죽을때 가난한 건 자기 탓이다.


물론 살다보니 돈이 많아져서 효도를 할 수 있게 된다면 해도 된다고 본다. 하지만 자녀된 사람이 홀로 서지 못한 상태에서 부모를 돕는다? 그건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된다.


물론 효도를 할 수 없는 지금의 내가 고통스러운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냉정할 때 생각해봐도, 효도는 현대사회의 덕목이 아니다. 농사하던 시대까지만 유용했던 덕목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이거다. "마음만 앞서지 말자."

위에서 저렇게 말했다고는 하지만, 돈이 많고 풍요로우면 그것을 자기를 보살핀 부모와 나누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물론 이것도 배푸는 것이지 부모가 당연하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쨋든,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계속 생각만 하며 고통받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나는 실증이 났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고통 받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가정의 가장은 현재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벌고, 그만큼 가정에 가져오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다. 흠. 그렇다고 해도 나는 남자가 가장이라고 생각되는데, 어차피 여자는 존경할 수 없는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정의 가장은 남자라고 생각해보면, 무능한 가장의 사과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무능한 가장은 아내와 자식에게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들을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한동안 술만 마시면 어떤 거 못 해줘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사회 탓을 했다.


나는 그 사과가 자기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것은 내 부모의 이야기다. 우리 아빠는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하루종일 누워서 tv만 본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들어온 엄마가 밥을 준비하면 같이 먹는다.


to 5 근무 자기계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뭔가 현실적으로 소득을 더 올릴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발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지금의 수준에서 머물면서 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쓸모없는 죄책감이라고 생각하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저희는 이제 아빠에게 기대하거나 원하는 게 없어요. 일 끝나고 집에 와서 하루종일 TV만 보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바뀔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쓸데없이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일을 안해서 가족들 굶기던 것도 아니잖아요."


아빠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싸가지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쓸모없는 죄책감에서 아빠를 구했다. 그 이후로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결 행복해 보인다.


내가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전에 나부토 쓸모없는 죄책감으로부터 나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붙였다.


"저도 효도하고 싶지만, 지금은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어요. 마음이야 있지만 현실적으로 부족해서 못 하는 거죠. 어차피 효도는 돈이 많아져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돈이 없는 지금 괜히 마음 쓰고 괴로워지는 건 바보같은 거죠. 그래도 저는 남이 돈 주는 일이 끝나도 쉬는 날 없이 진짜로 성장하고 있어요."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한다는 건 정신병 초기 증상이다." 참 맞는 말이다. 그 간극이 만들어내는 고통이 사람의 정신을 좀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한다고 해도, 변하는 속도는 빠르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들의 생각의 속도가 아니라. 행동의 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성형 AI가 내놓는 생각이 뛰어나고 빨라봤자. 사랑이 행동하는 속도로 세상은 변한다.

물론 이제는 기계가 행동하는 속도로 세상이 변하겠지만, 그 기계를 설정하고 가동하길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의 속도로 기계는 멈춰있다.


진짜 인류가 과학 발전의 수준을 못 따라가기 위해서는 AI에게 기계몸을 줄때다. AI로봇의 움직임은 실제로 인간보다 몇 배는 빠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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