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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현 Apr 11. 2024

감성을 이성적으로 휘두르기로 결정했다

아예 안 느끼고 안 쓰겠다는 게 아니다.

우선 나는 어려서부터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사랑이 2년 정도 그래 많이 쳐봐야 5년 정도 지나면 식는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이 앎을 통해서 식지 않게 관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 앎을 통해서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나는 상태-상황-환경을 차례대로 성장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이해했고, 지금 사랑은 사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7살에는 연애를 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지금도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확신하는데, 나는 이제 사랑을 안다.


어쨌든 사랑을 억누르고 참고 지내는 시간에 자기 계발을 했다. 아주 오랜 시간 솔로로 지냈으며, 점점 친구들과 멀어졌다. 그러고도 큰 변화는 없었다. 그 이유는 상태의 변화에 20대, 10년을 쏟아붓기로 경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고독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의 내 상태가 괴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독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일까. 이걸 장점이고, 강점이고 무기이며, 동시에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 사람들과 이렇다 할 교류 없이 살았다. 이 말은 조금 다르게 말하면, 대부분의 평범한 대중들과 멀어진 채로 대중이 아닌 지식인들이 집필한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생각이 아주 깊었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아주 완벽하게 똑같은 문장으로 스스로 공리주의를 만들었던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나는 그걸 공리주의라고 이름 붙이지 못했고, 그냥 내 삶의 태도라고 이름 붙이고 있었다.


이렇게 감성과 멀어지고 이성과 가까워진다는 건. 사람이 고독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독서가 저자와의 대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걸 정말로 "대화"라는 형식으로 인식했다면, 나처럼 수년간 거의 혼자 책을 읽을 경우 아마도 조현병 환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책은 대화가 아니다. 정신세계의 등대며 지도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독이고 외로움이다. 실존적으로 인간, 홀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고독뿐이다. 고독은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고 통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익숙해질 수 없다고. 그런데 충분히 익숙해질 수 있다. 다른 것에 몰입해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지긋이 고독으로 들어가 보면 된다.


우리는 그 자체로 고독이었으며, 타인을 통해 따뜻한 감정, 차가운 감정을 걸쳐 입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은 홀로 있으면 느낄 수 없다.


도파민은 기대감에 의해서 분비되는데, 진정으로 혼자가 된다면 약물에 의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파민을 분비시킬 수 없다. 그래서 ptsd를 이해받지 못하는 참전군인들은 약물에 의존하며 죽어가며, 우리가 이상형으로 뽑은 연예인을 좋아할 순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들과의 연애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도파민도 분비되지 않는다. 끼리끼리는 욕이 아니라. 끼리끼리 여야 엮일 만한 기대감에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제부터가 진짜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나는 23세 봄부터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해 8월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 사회복무를 시작했고, 사회복무를 마치고 한 달 후에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 감성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인관계 스킬을 학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험을 시작했다.

교회-냉정, 이성(내 본모습 그대로+약간의 거짓말-성적으로 문란한 듯), 사역.

사회복무-말 잘 듣는 부하.

주짓수-능력 없는, 밝고, 완전 E 성향의 관원.

알바-계속 웃어주고, 부탁하는 거 거절 안 하고, 싫은 소리 안 하고.


실험 결과를 알려주겠다. 뭐 딱히 내가 실험해 볼 필요는 없었지만, 경험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실험에서 깨달았다. 이번 실험은 5년 간 진행 되었다.


교회에서는 적이 생겼다. 딱히 인신공격이나 싸운 적은 없었다. 예상대로 문란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못생긴 사람들을 기준으로 소문이 퍼진 것 같았다. 여자들과 남자들에게 각각 다른 의도의 견제를 받았다.


사회복무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잘 챙겨줬다. 일처리도 똑바로 했으며, 모든 경우에 예의를 갖춰 존중, 존대했다.


주짓수에서는 처음 들어갈 때, 자기소개를 딱히 잘하는 거 없는데, 열심히 한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운동 재밌게 했다. 여기서는 딱히 뭐 없었다. 애초에 "별 능력 없고, 밝은 사람"은 많아서 그런지.


알바* 여기가 포인트다. 26살, 나머지는 거의 다 20대 초반이었다. 호구처럼 착하게 굴면 이렇게 된다. 영화 [도그빌]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1.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선을 넘으려는 남자가 생긴다.(방치)

2. 주변의 남자들이 하나 둘 선을 넘는다.(방치)

3. 날끼 있는 여자들이 선을 넘는다.(방치)

4. 예의 바랐던 여자들이 선을 넘는다.(방치)


자. 남자는 이런 호구를 옆에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 자신의 우월감을 느낀다. 사회적으로 높아 보이게 만들고, 착취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이런 호구를 착취한다.


남자 중에는 자기 소신을 지키며,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0.01% 정도의 극소수로 존재했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 결국 모든 여자가 나를 착취했다.


실험을 마치고, 나는 이 심리적 우위를 전부 뒤집어 놓았다.




역시 인간은 역겹다. 기본적으로 선함, 예의를 갖고 있고,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살인, 아니 부당한 일조차 일어나지 않을 텐데.


아무튼 나는 이번 실험을 경험적으로 좆같음을 몸과 마음, 노트에 세기고, 기준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기어오르고, 선을 넘는 건 다 막아낸다. 그리고 그런 원숭이들이랑 얽히지 않는다.

이 실험을 통해서 만들어낸 진짜 기준은 "화"를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다.


1. 나를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고 할 경우.

-이 경우 웃으면서 부탁하는 것도 포함한다.

2. 물리적으로 폭력을 쓰려는 암시부터 화를 낸다.


이 두 가지 경우에 화를 낸다. 그리고 화를 내는 방식에도 수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소리치며 화를 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평소에 웃고 지내며, 선을 넘는 걸 유머로 쳐내고, 위의 화를 내기로 한 기준 2가지를 시도하면 나는 내 웃음기, 장난기를 사악 빼버리고, 싸움과 경쟁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내 모습으로 담담하게 몇 마디 하면, 입 다물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짐승에게 느끼게 해주는 거다. 지금 누구한테 시비를 걸고 있는 건지.



이처럼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경험적으로 실험하면서 기준을 만들었는데, 나는 인지하고 실험을 설계했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대한 선을 빠르게 만들 수 있었다.


또 실험 중에는 완벽하게 극단값으로 나를 표현했다면, 이제는 조금 섞어서 진행한다. 부드럽고 지혜로운 성인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선을 넘으면 냉담하게 부딪힌다. 물론 자주 볼 상대가 아니라면 적당히 무시하지만 자주 봐야 할 상대가 그런다면 냉담하게 부딪힐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다면 무시하고, 그럼에도 그런다면 그 사람 주변을 불행으로 가득 채워주는 수밖에. 


감정을 이성적으로 표현하고,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여자의 눈물이 무기인 것처럼.

남자는 침착함과 냉정함, 이성과 기준을 바탕으로 한 유대와 사랑, 수호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 감정을 휘두르는 남자의 "기준"은 인생처럼 간단한 만큼이나 단단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단하기 때문에 그 속에 이미 넓은 아량과 예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처를 받는 경험에서 반드시 교훈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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